앞세대는 무겁고, 뒷세대는 무섭다. 사회는 386들에게 이전 세대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이후 세대에게 계승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컴퓨터 모니터에 아바타가 뜨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면서 쉽게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녀석은 얇은 속옷차림이다. 점잖은 체면에 내 이름을 달고 나타나는 녀석이 너무 헐벗은 모양이어서 옷을 입히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장난이 아니다. 내가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그 옷을 입히는 데 캐시를 적립해야 한단다. 그것도 윗옷과 아랫도리, 신발까지 다 갖추어 입히려면 족히 몇천 원이라는 돈이 필요하다. 아바타에 현금을 들여서까지 옷을 입혀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렇다고 없애버리자니 내가 유달리 고지식하다고 광고하는 것 같아 개운치 않다.
선배는 있으나 후배는 없는
이것이 이른바 ‘386’의 정서다. 굳이 원하는 것이 아닌 많은 것들을 단지 시대감각에 뒤지지 않기 위해 따라가야만 한다는 중압감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과감히 무시하며 부정의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스스로의 목소리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아직도 존중해야만 할 옛것의 가치들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샌드위치 세대다.
정년퇴임을 하는 한 학자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주화세력들은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굳이 민주화세력으로 국한하지 않고, 민주화세대라고 넓게 해석해서 받아들이자면 그런 말들은 ‘386’을 우울하게 한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버려진 느낌이 든다. 전쟁을 겪고, 근대화의 기수였던 세대들이 치러온 경험에 비하여 ‘386’이 밟아온 성장기의 경험들은 폄하되는 느낌이다. 너희들은 역사의 한 과정이었고, 다시 들추어내기 싫은 과정이었으며, 이제 되었으니 찍 소리말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이야기로까지 들린다. 우리의 앞세대를 보면 무겁고, 뒷세대를 보면 무섭다. 사회는 ‘386’들에게 이전 세대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앞선 세대들의 가르침은 훌륭하다. 어느 경험 하나 거저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386’은 이전 세대의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 마지막 세대, 즉 막차를 탄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이후 세대에게 계승할 수 없다. ‘386’은 선배는 있으나 후배는 없는 세대다. 민주화 이후의 세대, 이른바 신세대와 N세대를 아우르는 정보화 세대는 서구적 가치로 무장한 세대다.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화적 정서와 코드는 ‘386’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다. ‘386’이 지켜나가도록 배웠던 많은 것들은 너무 ‘구리구리한’ 것이고,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정보화 세대는 때로는 ‘귀차니즘’(만사 귀찮으니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뜻의 속어)을 내세우며 ‘386’이 사수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에 대한 대화를 차단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세대다. 경제활동의 일선에서 일하고는 있으나 주도적인 색깔은 없는 세대. 서구화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으면서도 그 혜택에서는 제외된 세대. 격렬한 개발논리가 만들어낸 부작용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세대. 솟구치는 집값에, 변덕스런 교육정책에 치여 잦은 이직에 이민을 꿈꾸는 세대. 어른 대접은 받지 못하면서도 어른 노릇은 해야 하는 세대. 그것이 ‘386’이다. 그리고 이면에는 우리가 기득권을 채 누려보기도 전에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뀔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 노무현과 아바타 몇년 전에 언론은 ‘이제는 386이다’라는 화두로 마치 사회를 주도하는 집단이 ‘386’인 것처럼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집중 조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불과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언론은 ‘20대의 전문가’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다. ‘386’ 정치인들이 나름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치 정치라는 것은 경륜이 최고의 자질인 양 결국 기성세대에 영합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386’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기에 과거는 너무 길었고, 미래는 너무 빨리 다가드는 셈이다. 노무현의 급부상은 ‘386’이 갖는 이런 소외감과 패배감에 연결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어느 후보도 ‘입맛 당기는’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번 선거에서, 노무현은 이른바 ‘아웃사이더’임을 경험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노무현이 가지는 막연한 신선감은 좀더 기성정치의 색깔이 덜 묻었다는 느낌을 준다는 의미에서 ‘386’의 숨은 열망이 투영된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386’에게 아바타처럼 실체는 없으면서도 선택을 강요하는 이미지에 그칠 수도 있다. 노무현의 신선함이 지속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노무현 스스로가 기성정치의 잔영을 완전히 떨치고 ‘386’의 열망을 구체적 대안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설혜심ㅣ연세대 강사(서양사). (박승화 기자)
정년퇴임을 하는 한 학자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주화세력들은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굳이 민주화세력으로 국한하지 않고, 민주화세대라고 넓게 해석해서 받아들이자면 그런 말들은 ‘386’을 우울하게 한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버려진 느낌이 든다. 전쟁을 겪고, 근대화의 기수였던 세대들이 치러온 경험에 비하여 ‘386’이 밟아온 성장기의 경험들은 폄하되는 느낌이다. 너희들은 역사의 한 과정이었고, 다시 들추어내기 싫은 과정이었으며, 이제 되었으니 찍 소리말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이야기로까지 들린다. 우리의 앞세대를 보면 무겁고, 뒷세대를 보면 무섭다. 사회는 ‘386’들에게 이전 세대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앞선 세대들의 가르침은 훌륭하다. 어느 경험 하나 거저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386’은 이전 세대의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 마지막 세대, 즉 막차를 탄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이후 세대에게 계승할 수 없다. ‘386’은 선배는 있으나 후배는 없는 세대다. 민주화 이후의 세대, 이른바 신세대와 N세대를 아우르는 정보화 세대는 서구적 가치로 무장한 세대다.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화적 정서와 코드는 ‘386’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다. ‘386’이 지켜나가도록 배웠던 많은 것들은 너무 ‘구리구리한’ 것이고,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정보화 세대는 때로는 ‘귀차니즘’(만사 귀찮으니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뜻의 속어)을 내세우며 ‘386’이 사수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에 대한 대화를 차단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세대다. 경제활동의 일선에서 일하고는 있으나 주도적인 색깔은 없는 세대. 서구화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으면서도 그 혜택에서는 제외된 세대. 격렬한 개발논리가 만들어낸 부작용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세대. 솟구치는 집값에, 변덕스런 교육정책에 치여 잦은 이직에 이민을 꿈꾸는 세대. 어른 대접은 받지 못하면서도 어른 노릇은 해야 하는 세대. 그것이 ‘386’이다. 그리고 이면에는 우리가 기득권을 채 누려보기도 전에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뀔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 노무현과 아바타 몇년 전에 언론은 ‘이제는 386이다’라는 화두로 마치 사회를 주도하는 집단이 ‘386’인 것처럼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집중 조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불과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언론은 ‘20대의 전문가’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다. ‘386’ 정치인들이 나름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치 정치라는 것은 경륜이 최고의 자질인 양 결국 기성세대에 영합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386’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기에 과거는 너무 길었고, 미래는 너무 빨리 다가드는 셈이다. 노무현의 급부상은 ‘386’이 갖는 이런 소외감과 패배감에 연결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어느 후보도 ‘입맛 당기는’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번 선거에서, 노무현은 이른바 ‘아웃사이더’임을 경험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노무현이 가지는 막연한 신선감은 좀더 기성정치의 색깔이 덜 묻었다는 느낌을 준다는 의미에서 ‘386’의 숨은 열망이 투영된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386’에게 아바타처럼 실체는 없으면서도 선택을 강요하는 이미지에 그칠 수도 있다. 노무현의 신선함이 지속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노무현 스스로가 기성정치의 잔영을 완전히 떨치고 ‘386’의 열망을 구체적 대안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