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11월10일 무너진 베를린장벽 위에서 독일인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깃발을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EPA 연합
11월11일 토론회에 참석한 김면회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외교학)도 “동독 내 자생적인 움직임이 독일 통일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독일 통일은 국제 환경과 동독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동독 주민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선택한 결과물이었다”고 설명했다. 2015년 독일 통일 25주년 기념사에서 당시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는 “통일은 평화혁명에서 생겨났습니다. 동독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강력한 민중운동을 통해 억압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라고 밝혔다. 평화혁명은 1989년 12월9일 동독 지역 라이프치히 주민 7만 명이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됐다. 당시 동독 정권의 유혈 진압, 발포 협박에도 라이프치히 주민들은 거리시위를 벌였고 동독인들은 에리히 호네커라는 스탈린주의 권력자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민중이 독재자를 피 흘리지 않고 몰아낸 평화혁명이고 동독인이 이룬 동독혁명이었다. 1990년 3월 동독 인민의회(국회의원) 선거에서 ‘빠른 통일’을 공약으로 내건 정당이 압승을 거뒀고, 그해 10월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미디어 쥔 서독 출신이 동독 사정 다루지 않아 안성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문제는 통일 이후 과정”이라고 말했다. 독일 통일 과정은 동독 5개 주가 서독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을 밟았다. 김누리 교수는 “동독이 서독 연방에 가입하려면 서독 기준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했다. 서독 기준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동독 사람 개인의 이력이 부정됐다. 자신의 모든 존재와 자신이 살았던 거대한 세계 전체가 부정된 꼴이 됐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독일 작가 마이케 네도는 통일 당시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하던 19살 대학생이었다. 네도는 동독인이 통일 이후 2등 시민이라고 느끼는 것은 구체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통일 뒤 1990년대 동독 사람들은 환희와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에 차 있었다. 내가 있던 라이프치히는 역사가 수백 년 된 출판사들이 있는 등 출판문화의 전통이 깊었다. 통일 이후 동독 출판업계 고용이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고 출판업계에서 일하던 상당수가 실업자가 됐다. 하지만 언론 등 공론장에서 이런 동독 사람들 이야기가 다뤄지지 않은 것은 미디어업계 주요 직책을 서독 출신이 맡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1990년대 이후 독일 통일을 포함한 동유럽 체제 이행 30년과 관련해 “유럽이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동유럽 체제 전환이 진정한 자유와 삶의 질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신 교수는 체제 이행의 후유증으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에서는 정치가 권위주의로 돌아가고,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으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 체제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확산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김주호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전담교수는 2013년 창당한 ‘독일을 위한 대안’ 정당이 옛 동독 지역에서 지지율이 오른 것에 주목했다. 이 정당은 반이민·반난민 등 극우, 극단적 민족주의 주장을 펴고 있다. 김주호 교수는 “외국인 혐오, 반이민·반난민 정서의 바탕에는 통일 이후 동서 격차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깔려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누리 교수는 “통일 이후 동·서독 간 사회문화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상태에서 남북 통일이 되면 동·서독 갈등은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을 2등 국민이 아니라 7등 국민 정도로 취급할 것이다. 지금 상황을 적용하면 지옥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KB금융공익재단
중1에게 통일이란
“동무는 남조선 치킨 먹어봤나”
11월8일 오후 1시 서울 서대문구 인창중학교 진로활동실. 이 학교 1학년 학생 20여 명이 `더불어 사는 남북통일 준비 남북경협’을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사진). 학생들이 ‘남북이 경제협력을 하면 내 일자리를 뺏기는 것 아니냐’를 놓고 토론했다. 먼저 한 학생이 “북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뺏기는 게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학생이 “북한이 우리보다 지하자원이 많으니 우리가 북한에 일하러 가면 도리어 일자리가 생길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에게 통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인창중 1학년 장준영군은 “통일이 되면 군대에 안 가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장준영군은 “남북한이 같이 잘사는 방식으로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같은 학교 1학년 김한준군은 “통일되면 북한 친구들과 게임을 같이 하며 놀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인창중 1학년들은 2시간 동안 남북한 경제체제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남북 경제협력의 가능성과 어려움 등을 공부했다. 중학생에게 어렵고 생소한 내용일 텐데 수업 소감을 물으니 뜻밖에도 “신박하다”(매우 참신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김한준군은 “처음 배운 내용도 많았고 통일과 경제를 생각해볼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북한에서 창업하기’였다. 모둠별로 북한에서 판매할 상품을 발표했다. 한 모둠이 발표한 상품 이름은 ‘핵 맛있는 치킨’이었다. 10대들에게 ‘핵’은 핵무기나 원자력발전과는 무관하다. ‘매우’란 뜻으로 강조할 때 단어 앞에 붙여 쓴다. 학생들이 만든 치킨 홍보 포스터는 “동무는 남조선 치킨 먹어봤나”였다.
이날 수업에 쓰인 ‘남북경협’ 교재와 강사 파견은 KB금융공익재단이 맡았다. 이 재단이 학생들에게 남북경협을 교육하는 것은 ‘하나된 한반도 경제공동체’가 남북 통합과 통일의 밑돌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동·서독 경제통합은 핵심 쟁점이었다. 동독과 서독이 화폐 통합을 1 대 1 비율로 했는데 당시 동독과 서독의 실질 화폐가치는 1 대 9였다. 일부 동독 사람은 화폐 통합으로 재산이 갑자기 9배가 되니 로또라고 좋아했다. 하지만 경쟁력을 상실한 동독 기업들은 독일 통일 1년 내 50% 정도 도산했다. 준비 없는 동·서독 경제통합으로 발생한 심각한 부작용이 지금도 독일에 남아 있다.
남북 경협 교육을 기획한 이옥원 KB금융공익재단 사무국장은 “남북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남북이 서로를 알아가는 게 ‘더불어 사는 통일 준비’라고 생각한다. 통일 세대의 주역인 10대 학생들이 ‘남북이 서로 잘사는 방식으로 통일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