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최대 민간인 학살 지역 빈호아에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치과진료 보조를 하다
멀리 야트막한 산과 푸른 벼들이 뜨거운 햇볕을 양식삼아 자라는 넓은 평야. 베트남 중부 시골마을의 풍경은 한여름 우리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편안하면서도 조금은 낯설었다. 베트남 하면 오렌지색 네이팜탄이 여름철 집중호우처럼 쏟아지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전쟁의 슬픔조차 풀과 나무가 자라는 데 거름이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 터인데 말이다.
소독기로 변한 압력밥솥
지난 3월17일 화해와 평화를 위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소속의 치과의사와 치위생사 53명이 베트남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에 도착했다. 우리로 말하면 시골의 리쯤 되는 빈호아사는 호치민에서 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다낭에서도 좁은 2차선 도로를 타고 3시간가량 들어가야 하는 작은 농촌이었다. 중앙선이 없는 좁은 도로에는 차보다 훨씬 많은 오토바이들이 육중한 트럭을 거침없이 앞질러 달렸다. 달릴 때 날리는 흙먼지를 막기 위해 수건을 복면처럼 둘러쓴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모습이 ‘전사의 후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빈선현을 가로질러 흐르는 짜꾹강 앞에 세워진 숙소 미짜 호텔에 도착하자 호텔 종업원들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2000년부터 해마다 이맘때쯤 의료연대가 진료올 때마다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진료단과 호텔 쪽 모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편한 표정이다. 그러나 진료단으로서는 올해 사정이 조금 다르다. 지난해까지 진료활동을 하던 선틴현과 달리 올해 처음 들어온 빈선현은 외국 진료팀이 한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다. 게다가 99년 사전답사 때 빈호아사 인민위원회에게서 “당신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다”는 문전박대를 당했고, 지난해 가을에 왔던 답사팀도 경계의 눈초리를 잔뜩 받은 터라 집행부의 얼굴들은 그리 편해보이지 않았다. 빈호아사는 베트남전 당시 430명의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 한국군의 총칼에 쓰러졌다는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지역이었다. “일동 묵념” 3월18일 아침 8시30분. 앞으로 4일 동안 빈선현 의료센터에서 진행될 진료활동은 전쟁 때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을 추모하는 묵념으로 시작됐다. 통역을 위해 다낭에서 합류한 호치민대 한국학과 대학생 10여명과 베트남 현지 의사 두명이 합류한 의료단 규모보다 의료센터의 여건은 매우 왜소해보였다. 평소에는 일반병원의 각 과가 배치돼 있는-그러나 응급실 외에는 좀처럼 이용되지 않는다는-방 4개에 각각 예진과, 소아치료·보존과, 치주·구강외과, 보철과가 들어섰다. 전날 세팅된 장비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간이의자와 진료기구들 외에도 현지에서 구한 이발소 의자 등이 동원됐다. 내가 속한 소독팀 역시 ‘야전식’ 작업을 해야 했다. 대부분 치과에서 쓰는 소독기구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풍년압력솥’이 소독기로 변모했다. 핀셋·미러 등 계속 써야 하는 도구들을 압력솥에 넣고 고압에서 살균하는 것-비의료인 표현으로는 팍팍 삶는 것-이 내 일이었다.
베트남엔 왜 언청이 환자들이 많을까
홍보가 잘 안 됐는지 오전 중에 한산하던 접수실이 오후쯤 되니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주민들로 먼지가 일기 시작한다. “줄을 서세요. 줄 서지 않으면 접수할 수 없습니다. 진료도 할 수 없습니다” 베트남 학생이 메가폰을 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절대로 줄을 서지 않는다.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서로를 밀착시키며 그 틈으로 또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온다. 무질서 때문에 자주 접수가 끊겼지만 4일 동안 줄은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줄 설 여유를 갖기엔 좀처럼 치과치료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이 더 급했나 보다. 이곳을 찾은 빈선현 의료청 관계자는 “이 하나 뽑는데 1달러 정도 드는데 그마저 형편이 어려워 치과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첫날 오전에는 언청이 수술을 위한 검진이 있었다. 지난해부터 진료단 활동에는 언청이 수술이 포함됐다. 진료단이 도착하기 전 현에서 모집한 언청이 환자 20여 명이 수술 판정 여부를 진단받는다. 베트남에는 언청이 환자들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정확한 원인이 분석된 건 아니지만 고엽제 영향이 클 겁니다. 우리나라처럼 적절한 시기에 수술받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수가 더 많아 보이기도 하죠” 지난해에 이어 진료단팀에서 수술을 집도한 부산대 치대 김종열 교수의 말이다. 이 가운데 이번에 수술을 받게 된 환자는 8명. 수술하기에는 너무 어려 돌아가야 했던 생후 3개월짜리 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가 진료실을 나와서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예진과에서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이를 뽑거나 신경치료를 받기 위해 각각의 과로 가서 대기한다. 사람들은 많지만 예상보다 비명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 정말 잘 참아요. 사람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니 마취주사도 급하게 놓을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통증이 더 심한데 별로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거든요.” 이뽑기를 앞둔 환자들에게 마취주사를 놓던 한 의사가 말한다. 아이들 역시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아이들보다 인내심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다. 진료의자 앞에서 몸부림치고 떠나가라 우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오백동짜리(우리돈으로 오십원)지폐를 쥐어주기도 하고, 의자에서 내려온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 다시 진료대에 앉힌다. “집에 가면 얻어맞을 줄 알라”는 협박인 것 같다.
산부인과 의사는 소독조?
진료 뒤에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아이들이 투약실에 와서야 얼굴을 편다. 약과 함께 남자 아이들은 치약과 작은 얌체공을, 여자 아이들은 치약과 머리핀을 선물받았다. 쭈뼛쭈뼛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뭐라고 하니 고개 숙여 수줍게 인사한다. 할머니들은 약을 주는 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면서 한참을 바라보기도 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의 그늘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상대방의 눈시울도 뜨거워지게 마련이다.
“몸무게가 한 5kg은 빠질 거예요”라던 정성훈 총무의 장담과 달리 소독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독조의 맥가이버 최주원 원장 덕이었다. 순천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최씨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이 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소독기구 하나 없는 낙도 군의관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위생적이면서도 간단하게 소독절차를 줄였다. 오히려 힘든 건 소독 전 기구 설거지였다. 경황이 없던 첫날 오전에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설거지를 했다. 한창 정신이 없는데 “꼭 장갑 끼세요. 이곳에는 결핵환자들이 많아요”라고 누군가 지나가며 이야기한다. 날카로운 기구를 많이 쓰는 치과의사들의 진료중 에이즈 감염이 많다는 이야기도 그제서야 생각났다. 갑자기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조로 나뉜 진료단은 둘쨋날부터 한조씩 번갈아가며 답사를 떠났다. 진료활동과 함께 밀라이 박물관과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 답사는 진료단 활동의 큰 축이다. 내가 속한 3조는 둘쨋날 답사를 떠났다. 학살 증거사진이 공개되면서 베트남 반전운동에 불을 붙인 밀라이의 학살현장에 세워진 밀라이 박물관은 자료사진들과 위령탑, 조각상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박물관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외국인 방문객의 줄이 좀처럼 끊이지 않는 듯했다. 반면 오후에 찾아간 빈호아사는 인민위원회 앞에 세워진 세개의 위령비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503명과 430명. 학살 규모나 잔인함에서 밀라이와 빈호아사는 큰 차이가 없지만 밀라이는 베트남전의 상징이 된 반면 빈호아사는 여전히 가려지고 부정되는 역사의 그늘이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을 국가적 수치로 기억하는 반면, 우리에게 베트남전은 여전히 형제자녀들의 학비를 대고, 나라의 경제를 살린 그럴듯한 명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위령비 가운데 하나의 뒷부분에는 큼지막한 폭탄 구덩이가 있었다. 그곳은 흔적도 없이 뭉개진 36명의 당시 사망자들이 묻힌 무덤이기도 하다.
학살 당시 3개월 된 아기로 엄마의 주검 밑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도안 응 이(36)가 방문한 한국인들을 맞이했다. <한겨레21>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기사에도 등장했던 도안은 이미 여러 번 만난 한국사람들이 낯설지 않은 듯했다. 당시 탄피액이 눈에 들어가 실명한 그는 엉덩이에 남아 있는 총탄자국을 보여주면서도 “고통스러운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제 두 나라가 더 이상 상처주는 일 없이 사이가 좋아졌으면 해요”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격렬한 분노와 원망을 예상하던 답사팀은 다소 당황하기도 했다.
“당신들은 광주학살을 얼마나 되새기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온후한 분위기’에 의아해하던 몇몇 사람들의 궁금증은 셋쨋날 밤에 있었던 베트남 시인 탄타오와의 만남과 베트남 학생들과의 대화로 이어졌다.전쟁 당시 약관의 나이로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내려온 베트남 전사인 탄타오 시인은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밀라이의 아이들> 같은 시를 통해 전쟁의 기억과 상처를 기록해온 베트남의 국민시인이라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 죽은 부대원들은 대부분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이성과 입맞춤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사랑의 크나큰 적입니다.” 현지에서 학살의 잔인함이나 규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별로 놀라지 않던 내게 시인의 말은 오히려 충격이었다. 그 수나 학살방법 따위에 대해 머리로만 받아들이던 베트남전의 진실을 시인은 가슴으로 말하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쉽게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왜 피해자들은 솔직하게 자신들의 분노와 원망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빈호아사에서 말을 아끼는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큰 답답증이 밀려왔다. 짧은 시간 머무르는 여행자의 조급함이 섞인 그 말에는 깊은 이해보다 얕은 기대가 섞여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친구들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첫해부터 현지 가이드를 맡아온 짱(24)이 나중에 조별모임에서 “(이런 질문들에) 너무 화가 났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1년 동안 한국에 머물던 그가 “한국인들은 광주학살에 대해 지금 얼마나 기억하고 되새기는가”라고 던진 반문에는 한국인들이 여전히 베트남인들을 화면 안의 배우처럼 대상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타가 섞여 있었다.
첫날 419명에 지나지 않던 환자들 수가 점점 늘어 마지막 날에는 800명을 넘겼다. 올해 처음으로 시작한 예방교육에도 1천여명의 주민들이 참가했다. 당연하게도 칫솔질보다는 교육 뒤에 나눠주는 칫솔과 치약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지만 말이다. 점심을 먹다가 베트남인 치과의사 티엔(29)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치민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는 그의 수입은 다른 베트남 노동자들과 비슷하지만 퇴근 뒤 개인적으로 치료활동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한다. 이처럼 학교나 성 또는 현 의료센터에 있는 치과의사들은 우리나라의 60년대처럼 업무가 끝나고 다들 개인진료를 한다. 당연히 공무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개인진료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지난해 진료단이 의료센터에 기증하고 간 치과 기구들도 모두 의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올해는 남은 기구들을 다 챙겨가기로 했다. 자본주의화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한국이 세워준 위령비, 지워진 비문…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진료단 전체가 하미 마을로 마지막 답사를 갔다. 그곳에는 한국군 참전군인들이 세운 위령비가 서 있다. 지난해 진료단이 왔을 때 적혀 있던 비문이 모두 지워졌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집들은 불타고, 불에 그을린 시신들이 얽히고 설키고…” 한국군 청룡부대가 저지른 당시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적은 이 비문을 참전군인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준공식을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풀린 문제보다 풀어야 할 문제가 훨씬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단지 학교를 세워주거나 의료혜택을 ‘베푸는’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치료를 하면서도 내가 또 다른 죄를 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는 한 치과의사의 말은 40여개의 큼직한 진료가방을 들고 와서 그보다 더 무거운 고민거리를 지고 가는 참가자들의 가방 속에 담긴 화두 중 하나다. 이번에 진료단이 1785명의 환자들과 만나 나눈 눈빛은 이제 시작해야 할 속 깊은 대화의 시작일 뿐이다.
쿠앙응아이=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기 때문에 마취주사도 서둘러 놓을 수밖에 없다. 통증이 심하련만 베트남 주민들은 신음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는다.
빈선현을 가로질러 흐르는 짜꾹강 앞에 세워진 숙소 미짜 호텔에 도착하자 호텔 종업원들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2000년부터 해마다 이맘때쯤 의료연대가 진료올 때마다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진료단과 호텔 쪽 모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편한 표정이다. 그러나 진료단으로서는 올해 사정이 조금 다르다. 지난해까지 진료활동을 하던 선틴현과 달리 올해 처음 들어온 빈선현은 외국 진료팀이 한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다. 게다가 99년 사전답사 때 빈호아사 인민위원회에게서 “당신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다”는 문전박대를 당했고, 지난해 가을에 왔던 답사팀도 경계의 눈초리를 잔뜩 받은 터라 집행부의 얼굴들은 그리 편해보이지 않았다. 빈호아사는 베트남전 당시 430명의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 한국군의 총칼에 쓰러졌다는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지역이었다. “일동 묵념” 3월18일 아침 8시30분. 앞으로 4일 동안 빈선현 의료센터에서 진행될 진료활동은 전쟁 때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을 추모하는 묵념으로 시작됐다. 통역을 위해 다낭에서 합류한 호치민대 한국학과 대학생 10여명과 베트남 현지 의사 두명이 합류한 의료단 규모보다 의료센터의 여건은 매우 왜소해보였다. 평소에는 일반병원의 각 과가 배치돼 있는-그러나 응급실 외에는 좀처럼 이용되지 않는다는-방 4개에 각각 예진과, 소아치료·보존과, 치주·구강외과, 보철과가 들어섰다. 전날 세팅된 장비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간이의자와 진료기구들 외에도 현지에서 구한 이발소 의자 등이 동원됐다. 내가 속한 소독팀 역시 ‘야전식’ 작업을 해야 했다. 대부분 치과에서 쓰는 소독기구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풍년압력솥’이 소독기로 변모했다. 핀셋·미러 등 계속 써야 하는 도구들을 압력솥에 넣고 고압에서 살균하는 것-비의료인 표현으로는 팍팍 삶는 것-이 내 일이었다.

"어디가 아프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진료현장에서는 신기하게도 잘 통한다.

"줄 좀 서세요." 접수하는 베트남 학생이 아무리 소리쳐도 마음 급한 환자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지난해에 이어 진료단은 올해 8명의 언청이 환자들을 수술했다 수술전 예진을 받는 아기환자.

빈호아사의 위령비 뒤쪽 폭탄구덩이에는 한국군의 칼 끝에 쓰러진 민간인 36명이 잠들어 있다.

답사과정에 들른 쿠앙남성 하미마을의 위령비. 한국의 참전군인 단체가 세워준 이 위령비는 주민들이 처음에 썼던 비문(왼쪽)을 참전군인들이 문제삼자 연꽃그림으로 덮여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