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정치교육의 장
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사진/ "여성의 절박한 현실을 감안해 박근혜를 지지하겠다"는 최보은(왼쪽)씨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하는 것은 생물학적 환원론이다"라고 비판한 김정란(오른쪽) 교수. (이정용 기자)
지금까지 여성의 대표로 인식되지도, 본인이 여성 대표임을 내세운 일도 없는 박근혜 의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번 소란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제를 제기한 최보은씨의 주장을 먼저 들어보자. “왜 여성 진영은 참정권 행사를 여성의 독자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해 바라보지 않고 ‘진보진영’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려 하는가. …이미경 의원이나 추미애 의원이 온전히 자신만의 역량으로 정치기반을 다져서 후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그들보다(오로지 구조적 프리미엄 덕분에) 훨씬 더 한 정치적 경륜과 식견으로 무장한, 더욱 탄탄한 정치기반이 있는 ‘진보적 남성 후보’들이 언제나 ‘우선순위’ 앞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능성을 믿고 무한정 때를 기다리기에는, 여성의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지 않은가.”
박근혜라는, 근대 이후의 여성 역사상 가장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간 한 여성에게 전략적으로 표를 던지는 것이 온갖 진입장벽이 가로놓인 여성의 참정권을 적극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 의견은 여러 갈래로 나왔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큰 반박은 두 가지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를 고착시킨 장본인인 박정희에게서 정치수업을 받았다는 한계와, 박근혜 의원 자신이 여성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워오지도, 여성 대표로서 검증되지도 않았다는 평가다. 따라서 “단지 치마를 둘렀다고 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은 역사적 퇴행이며, 앞으로 여성 정치인 육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수구적인 정치인들과의 연대할 가능성도 높은 그의 정치적 색깔을 보면 오히려 여성의 이해관계에 역행하는 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한몫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정란 상지대 교수는 “오죽하면 박근혜를 이용해서 여성 지위의 열악함을 극복해볼 생각을 했겠는가. 절박한 심경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발상이다”라고 질타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박정희가 씨앗을 심어놓은 지역감정에 매몰돼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태도는 비이성적이며 심각하다.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코드는 바로 이 층위에서 작동한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코드로 작동하지 않는다. 박근혜가 스스로를 여성의 코드로 자리매김하고 싶어도(그 의지도 아직까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녀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않고 합리적 정책 개발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쌓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정임 살류쥬 전 대표는 “약자의 권력이 정당하게 주어진 적이 없다”고 최씨의 주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여성은 서로 생각이 달라도 권력 창출을 위해 연대하는 훈련은 별로 되어 있지 않다”고 전제하며 “박근혜 같이 대중성 있는 여성과 연대해 노력한다면 반여성적인 정치적 환경은 조금이라도 다르게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살류쥬 동인이었던 노혜경 시인은 “장 전 대표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반박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박근혜를 지지할 정도로 충격효과가 필요한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고 본다. 당장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선거인단 남녀비율을 보라. 40대 이후에는 차이가 나지만, 40대 미만으로 가면 남녀 신청자의 경쟁률이 거의 비슷하다.”
지금까지 여성단체 등에서 공식적으로 박근혜 의원을 놓고 논쟁을 벌인 일은 없다. 그러나 이번 소란은 박근혜 의원이 '대권도전 능력이 있는 희귀한 여성 정치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여러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박 의원을 포함해 상당수 여성들에게 의미 있는 정치교육의 장이 됐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인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