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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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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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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용호 기자)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1992년 봄. 여당 대표인 YS는 기자회견에서 ‘공작정치론’을 제기합니다.

당내에 자신이 후보가 되는 것을 조직적으로 견제하는 세력이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짤막한 자료에 “이 땅에 더 이상 공작정치가 용납돼서는 안 된다”라는 문구가 전부였지만, 많은 신문들은 말 한마디에 살을 붙여 ‘공작정국’으로 몰고갔습니다.

민주당 경선에서 제기된 ‘음모론’은 10년 전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물론 상황적 유사점이 있지만, 사람도 시절도 바뀌었으므로 둘을 정치사의 놀라운 반복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당시에도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누가 나를 죽이려 했다, 누가 어느 편을 들었다는 것은 증거가 제시되기 전에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입증책임이 없는 의혹의 제기입니다.

공작정치론을 제기할 당시 YS는 후보가 되지 못하면 탈당할 태세였습니다. 자신을 공작대상으로 삼는다면 당을 같이하기 어렵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판을 깨겠다는 압박과 명분축적의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요컨대 증거나 실체가 받쳐주지 않는 공작정치론이나 음모론은, 여차하면 나 살 궁리를 하겠다는 역공작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역공작은 ‘무조건 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내가 되지 않는 것은 비정상이며, 그러한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음모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작동기제가 있다면 당연히 까발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경선과정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역공작으로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시된 음모론의 증빙은 빈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후보 사퇴와 여론조사를 음모의 시각에서 보는 것은 억측입니다. 실정법에 걸리거나 득표력에 한계를 보인 후보들이 사퇴하는 것은 경선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언론이 여론조사를 앞세워 특정후보 밀어주기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느 방송사는 여론조사 결과 편차가 너무 크게 나오자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0년 전 여당은 막강한 조직,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공작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YS는 공작정치론으로 재미를 봤습니다. 그에게는 어떻게든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 외에 민주화라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때와 다른 것은 경선주도세력입니다. 소수의 음모가 아니라 다수의 이반이 판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음모를 꾸민다해도 약발이 떨어지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어설픈 음모론은 제기하는 쪽에 부메랑이 될 수 있습니다. 후보 자신이 직접 음모론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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