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시민탐정, 돈선거를 잡아라

401
등록 : 2002-03-20 00:00 수정 :

크게 작게

민주당 국민경선 현장에 뛰어든 대선감시시민옴부즈만의 ‘불법 추적’현장에 동행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식사를 제공하며 막판 조직다지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세명씩 짝을 지어 식당가로 ‘잠입’하십시오.”

15일 낮 12시15분께 민주당 대선후보경선이 치러질 광주광역시 염주체육관 앞에 관광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이날 아침 8시께 서울을 출발한 대선감시시민옴부즈만(이하 시민옴부즈만) 소속 활동가 40여명이 두번째 출장 감시활동에 막 나서는 순간이다. 기자는 서울에서부터 이들을 동행취재하고 있는 터다.

식당가의 증거 수집


사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치러진 16일 오후 광주시 염주체육관 앞에서 시민옴부즈만 소속 자원활동가 이창림(26)씨가 선거운동원들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성급한 행동은 금물입니다. 일단 현장을 포착하면 상황실로 연락을 주십시오. 녹음기와 카메라조가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상대방이 알아채서는 안 됩니다.” 김민영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지난주 제주·울산지역 현장 감시활동을 떠올리며 ‘증거확보’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작전지시를 방불케 하는 주문이다.

보스정치와 공천비리로 얼룩진 한국 정당사에서 정당 민주화를 위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는 국민경선제. 하지만 낡은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제도의 정착은 쉽지 않다. 돈선거를 뿌리뽑고,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지난달 25일 출범한 시민옴부즈만의 활동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여연대 시민로비단 소속 설병준(64)씨는 동료 조응구(61)씨와 염주체육관 맞은편으로 발길을 옮긴다. 기자도 ‘어르신들’의 뒤를 따랐다. ‘버섯불고기 전문점·연회석 500석 완비’. 음식점 간판에 적힌 글귀는 시민옴부즈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차장은 이미 만원을 이뤘고, 멀리서도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바쁘게 드나드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비탕을 주문한 뒤 “손님이 많다”며 아는 체하는 설씨의 말에 식당주인이 “선거하러 온 손님들”이라고 대꾸한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설씨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점심밥을 먹고 가는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나간다. 빨리 녹음기와 카메라를 보내달라.” 초조한 기다림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사이,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뜬다. 참다 못한 설씨가 계산대로 걸어간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밥값도 안 내고 그냥 나가던데.” “그런 건 왜 물어요. 누구신데요?” 식당주인의 얼굴이 굳어지며 퉁명스런 대꾸가 바로 나온다. 뒤늦게 장비를 갖춘 감시단원이 도착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더 이상 시도해도 묵묵부답으로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식당가 순례’를 마친 감시단원들은 오후 1시께 염주체육관 앞으로 다시 모였다. 광주기독교청년회 등 현장 감시활동에 동참하는 지역단체와 함께 시민옴부즈만이 도착했음을 후보진영과 선거인단에게 알리는 시간이다. “돈 선거 뿌리뽑아 정치개혁 앞당기자.” 시민옴부즈만의 구호가 높아지는 사이 경선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난 3월7일 개정된 정당법에 따라 이제 당내 경선과정에서 저질러진 부정선거도 법적 처벌이 가능해졌다. 시민옴부즈만이 제주·울산지역 경선과정에서 적발한 부정선거 사례가 첫 적용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며 시민옴부즈만 쪽에 경선자금 관련 회계장부 공개를 약속했던 대선주자들은 아직까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한복 아줌마 관광버스를 쫓아라

사진/ 대선감사옴부즈만 단원들이 '깨끗한 정치'를 상징하는 '파란 엽서'를 경선장소로 향하는 선거인단에게 들어보이고 있다.
‘깨끗한 정치’를 상징하는 파란색 엽서를 흔들며 정치개혁을 외치는 시민옴부즈만 앞으로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며 경선장으로 향하는 선거운동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시민의 힘으로 정치개혁 앞당기자”는 시민옴부즈만의 구호는 어느새 특정후보를 연호하는 군중의 외침에 묻혀버렸다.

김영배 민주당 선거관리위원장은 이날 오후 2시께 광주지역 경선 개막을 선언하며 “헌정사상 유례없는 국민경선제가 성공하려면 돈선거와 상호비방, 지역감정이 사라져야 한다”며 “후보자와 운동원, 선거인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관련규정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제주·울산지역에서 발생한 선거부정 사례에 대해서는 “부정선거 사례가 6건 적발됐다”라고만 짧게 언급한 채 후보에 대한 직접 경고를 피해갔다.

오후 5시30분.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광주 경선은 마무리됐지만, 신중식 참여연대 간사의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선거운동에 나선 ‘아줌마 부대’의 뒤를 쫓기로 한 것이다. 동원된 기색이 역력하던 이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20여분 만에 도착한 곳은 광주 송정리역 맞은편의 ㄷ중국요릿집. 잇따라 도착한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들도 이들과 합류해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간 집결지’에서 베풀어지는 향응이었다.

잠시 뒤 책임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나 테이블을 돌며 술을 따르고 음식을 더 시키는 모습을 맞은편 건물에서 신 간사가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그 사이 음식점 잠입을 시도한 광주지역 활동가는 소득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음식점 1층까지는 들어갔으나 2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주최 쪽에게서 제지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밀폐공간에서 벌어지는 부정선거는 현장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향응제공 중단하라. 돈선거를 중단하라.” 17일 오전 9시께 대전지역 경선이 치러지는 엑스포 무역전시장 앞에 시민옴부즈만이 어김없이 자리를 잡았다. 전날 밤 11시가 넘어서야 대전에 도착해 새벽까지 회의를 한 활동가들은 다소 지쳐보였다.

“어제 광주에서 지역주의 폐퇴의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경선장 인근에서 향응제공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모습 또한 감지됐습니다. 몇몇 장소에서 가벼운 실랑이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점심시간에 향응제공 등이 우려됩니다. 향응제공 차단에 주력해 주십시오.” 김민영 국장의 설명을 뒤로 한 채 옴부즈만들이 경선장 주변으로 모습을 감췄다.

“지난 11일 지방선거 후보 부적격자 신고 및 의견제안을 위한 ‘유권자의 전화’를 개설했는데 뜻밖에 민주당 경선 부정선거 관련제보가 하루 6∼7건씩 쏟아졌습니다. 상근활동가 6명으로 ‘비상 옴부즈만’을 구성해 감시활동에 나서 몇 차례 부정선거 사례를 적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25명이 8개조로 나눠 둔산동과 만년동의 식당가,경선이 열리는 엑스포 무역전시장을 중심으로 감시활동을 벌일 예정입니다.”

왜 대의원 휴대폰까지 공개했나

사진/ 참여연대 시민로비단 소속 회원들이 감시 활동을 마친뒤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심규상 대전참여자치연대 기획실장은 “시민옴부즈만에게 현장이 적발되더라도 대부분 ‘전자투표 방법을 설명한 것’이라거나 ‘서먹서먹한 대의원들끼리 경선을 앞두고 상견례나 하자는 취지’라고 둘러대 문제삼지 못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당원끼리 하는 비공식모임에서도 식사 제공은 불법이지만, 당원교육이나 당내행사, 당무활동을 위한 모임이라고 하면 민주당 선거규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 실장은 또 “당에서 공모선거인단 휴대폰 번호까지 모두 알려준 모양인데, 이는 부정선거를 부추기는 짓”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정작 부정선거 감시활동을 벌여야 할 민주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오히려 시민옴부즈만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민주당 선관위 관계자는 “시민단체가 국민경선에 대해 뭘 도와준 게 있다고 자기들만 깨끗한 체 감시활동을 벌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한화갑 후보를 끝으로 이날 오전 11시30분께 경선후보자 연설이 마무리되면서, 시민옴부즈만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단을 들고 다니며 인원을 점검하는 사람이 목격됐다. … 행사장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을 따라가보라.” 카메라를 손에 들거나 녹음기를 품 속에 감춘 시민옴부즈만들이 다시 ‘산개감시’에 들어간다.

감시활동에 처음으로 참여한 자원활동가 송한욱(23·서강대 4)씨는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돈선거에 익숙한 유권자가 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깨끗한 선거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동원한 것이 역력해보이는 사람들에게 ‘당원이냐.누구를 지원하러 왔느냐’고 물어도 ‘그냥 놀러왔다. 자발적으로 온 지지자다’라며 발뺌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와 대전에서 직접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시민옴부즈만의 활동은 이번 경선에서 이미 소금과 같다. 상지대 정대화 교수(정치학)는 “시민옴부즈만이 제주·울산에서 부정선거 사례를 적발한 뒤 노골적인 금품과 향응제공이 줄었다”며 “당 선관위가 뒷짐진 상황에서 시민옴부즈만이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돈선거에 대한 예방효과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대전지역 경선이 마무리된 오후 2시께. “돈선거를 뿌리뽑아 정치개혁 앞당기자” “시민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자”고 외치는 시민옴부즈만 곁을 지나던 한 노인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흘린다. “다음에는 우리 차례여.” 이인제 후보의 압승에서 이 지역 출신 대통령의 출현 가능성을 읽은 것일까. 시민옴부즈만이 마침내 찾아가야 할 곳은 유권자들의 마음속인 것 같았다.

광주·대전=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