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20. 401호>
자본주의 ‘최전선’으로 간 ‘천재’조옥화… 간호사·조산사·도시빈민에서 여성운동으로
몇 번의 인터뷰 요구 끝에 조옥화(48)씨는 이렇게 되물었다. “도대체 왜 나를 대상으로 삼았는지 그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이쯤 되면 이미 절반은 일이 진행된 셈이다.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그거지 뭐.” 그것이 내가 25년 넘는 세월 동안 조옥화씨를 바라볼 때마다 받은 느낌이었지만 조옥화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그런 거 없어.하종강 씨가 지난번에 쓴 글처럼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나 되지 말자’는 생각뿐이야.”
“조옥화씨가 언제 한번이라도 ‘크게 성공해서 떼돈 좀 벌어보자’든지 아니면 ‘세속적으로 출세해서 이름 한번 떨쳐보자’고 생각해본 적 있어? 없잖아. 내 말이 맞잖아.그럼 인터뷰할 만한 거야.” 나의 기특한 답변에 감격했는지 전화기 저쪽에서는 잠깐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집들이의 조건과 미국 오이
조옥화씨는 흔히 말하는 ‘천재’다. 초·중·고등학교를 조옥화씨와 함께 다닌 어떤 이는 그 12년 세월 동안 IQ 검사에서 매번 ‘전교 2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푸념한다. 조옥화 씨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창생은 비로소 대학에 가서야 IQ 검사에서 1등을 해볼 수 있었다(조옥화 씨와 그 동창생은 이 얘기를 빼자고 했다.‘1등’을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더욱 조장하는 일이라고…. 독자들이 알아서 감안해주기 바란다). 다른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조옥화씨에게도 수많은 ‘기행’에 관한 전설들이 따라다니는데, 책 몇 권 분량은 되고도 남을 많은 얘기들 중에서 나와 관계된 한 가지만 추려보자.
82년, 내가 결혼하고 나서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던 ‘집들이’에 조옥화씨는 우리 부부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했지만 오지 못했다. “언제 한번은 와야 할 것 아니냐?”는 우리의 성화에 조옥화씨는 “너희 부부 가운데 재워준다면 가겠다”고 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이는 정말로 우리 집에 와서 한 이불을 덮고 아내와 나 사이에서 딱 하룻밤을 잤다. 그날 저녁, 조옥화씨는 세수를 하고 나더니 우리 집 발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우리 부부는 “발수건도 못 알아봐? 수건에 발바닥 그림은 괜히 그렸는 줄 알아?”라고 실컷 놀렸는데, 조옥화씨는 다음날 아침,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오더니 말했다. “나, 이 집 얼굴 수건으로 발 닦고 왔다.복수하느라고….”
그 무렵, 조옥화씨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이 외모와 다를 수 있다는 걸 곱배기로 깨우쳐주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조옥화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거 칭찬인지 흉인지 모르겠네… 그걸 좀 확실히 해줘.”
조옥화씨의 ‘천재성’은 내가 보기에 모계혈통의 유전인자인 듯하다. 언젠가 한번은 다 자라 어른이 된 조옥화씨가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지나는데 어릴 적에는 그렇게 귀하던 바나나가 곳곳에 널려 있더란다. “엄마, 저것들이 다 뭐유?” 조옥화씨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저게 바로 미국 오이인데,먹으면 아주 쓰단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다.
다섯 형제들 중 둘째였는데 “빨리 취직해서 아래위의 남자 형제들을 도와주어야지” 하는 생각에 간호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아주 착한 아이였던 거지.” 우리는 같이 웃었다. “이걸 시험이라고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쉬운 입학시험에서는 거의 만점으로 수석을 차지했고, 당연히 졸업도 수석으로 했다.
‘운동권’자녀들을 받아낸 손길
첫 직장인 종합병원에서는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이 살다가 가장 절박하고 어려운 형편일 때 찾아오는 병원에서,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병원의 운영 시스템은 거의 충격이었어.” ‘백의의 천사’였지만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종합병원에 1년 남짓 있다가 “마음이 좀더 편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서울 청계천의 판자촌 주민들이 집단 이주한 남양만 간척지였다. 그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험난한 행적을 조옥화씨는 “내 마음이 편한 곳으로 찾아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TV의 각종 선발대회나 퀴즈대회의 결선에 올라온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담담’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럴 때 써야 한다.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에서 주민들의 의료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는 활동을 했다. “거기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수배된 사람들이 그곳에 많이 숨어들어왔거든. 그때 마침 <대화>라는 잡지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그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 속에서 생각을 많이 깨우쳤지.이전까지는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그냥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내 생각의 차원이었거든.” 그런 사고의 질적인 전화를 우리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자신이 사람들을 돕는 데 너무 무력하다고 느껴 ‘조산원’ 수련과정을 거쳤다. 그날 이후 조옥화 씨가 받아낸 아기는 수백명에 이른다. 우리 사회 운동권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의 자녀 중에는 조옥화씨의 손길을 거쳐 세상으로 나온 아기들이 많다.
“병원보다 더 많이 서민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의료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건소에 들어가 있던 조옥화씨가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로 온 것은 1981년 1월이었다. 그곳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자원봉사자’ 행세를 하던 나는 70년대 초반 학창시절에 잠시 어울린 조옥화씨를 그곳에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동일방직 사건’ 등으로 집중 탄압을 받게 된 그 단체가 새롭게 ‘도시빈민활동’의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고, 조옥화씨가 이를테면 그 총책이었다. 조옥화씨는 그곳에서 2년 만에 ‘민들레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지역의료보험이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던 그때에는 획기적인 ‘의료공동체’였다. 어깨를 옆으로 돌려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판자촌 골목길을 환등기와 교육자료들을 무겁게 챙겨든 조옥화씨가 누비고 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들과 같아지는 것’
조옥화씨는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끝내는 철길 옆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들어가 스스로 ‘도시빈민’이 되었다. 군불을 때는 그 방에 사람들이 참 자주 모였는데,새벽녘이 되면 바로 옆을 지나는 기차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 위를 밟고 지나는 것처럼 느껴져 화들짝 잠을 깨곤 했다. 아침부터 아래위 옆집에서는 등교하는 아이들이 학용품 살 돈을 부모에게 조르다가 야단 맞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 조옥화씨는 노동현장에 투신해 전자회사에 다니면서 ‘조직사업’에 복무했는데, 우리 사회 노동운동의 전형이던 그 기간의 조옥화씨 행적에 대해 나는 거의 모른다. 오히려 ‘서로 알면 안 되는’ 시기였다. 활동하는 지역이 달라 한동안 ‘일터’에서 만나는 것이 뜸했다가 모처럼 조옥화씨가 꾸려가는 단체에서 강의를 할 일이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그 모임의 진행자인 조옥화씨에게 다가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몇 년 만에 다시 ‘현장’에서 뵙게 되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조옥화씨는 예의 그 빠른 말씨로 답했다. “하종강, 너 참 많이 컸다.언제 그렇게 자랐어?” 내 강의에 대한 최대의 칭찬이었다.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산업사회보건연구회, 민주개혁을위한인천시민연대, 인천참여자치연대 등 ‘풀뿌리지역단체’에서 사무국장이나 대표 등의 굵직한 직함들을 갖고 있었거나 아직도 갖고 있는 조옥화씨는 최근 개관한 ‘시흥여성인력개발센터’의 관장으로서 “여성의 능력개발과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과 자립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도시빈민·노동자·여성 등 자본주의 사회의 저변을 뒤흔드는 ‘최전선’만 줄기차게 좇아온 셈인데, 그 행보를 조옥화씨는 “마음이 편한 곳으로 찾아다닌 것”이라며 부끄러워한다.‘몸이 편한 곳’만 찾아다니는 세상 사람에게 이르나니,마음이 편한 곳으로 가라!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집들이의 조건과 미국 오이

사진/ 시흥여성인력개발센터의 '산후도우미 양성과정'에서 강의하는 조옥화씨. 요즘 그는 "여성의 능력개발과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과 자립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사진/ "사람이 외모와 다를 수 있다는 걸 곱빼기로 깨우쳐주는 사람." 시흥여성인력개발센터 회원들과 함께한 조옥화(가운데)씨. (김종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