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선 전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 동행’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도 다른 나라·언어·문화를 가진 이주민을 위한 호스피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진수 기자
“독일에 독일인을 위한 호스피스는 많다. 하지만 200여 국가에서 온 이주민을 위한 호스피스는 동반자가 유일하다. 50년 전 광부나 간호사로 독일에 오신 분 중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치매에 걸린 분들도 있다. 그들은 독일에서 죽음을 맞는 걸 원치 않지만, 가족과 생활 터전이 독일에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죽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언어와 종교, 문화가 다른 이들이 죽음 앞에 설 때 이들을 누가 돌볼까. 독일이 국가가 목사를 관리한다고 해서, 무슬림들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를 수 없지 않냐.” 김 전 대표는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말은 이주민이 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안긴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2018년 12월 말 기준 236만 명으로, 2012년 145만 명보다 약 90만 명 늘었다. “한국 정부도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의 죽음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외국인이라서 지원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한국에 사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삶을 마감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2017년 암 사망자 중 22%만 호스피스를 이용했다. 2016년보다 4.5%포인트쯤 늘었지만 아직 한국에서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등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이 척박하다. 하지만 다문화 사회로 가는 현재 상황에서 한발 앞서 대처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방인도 독일인처럼 죽을 수 있다면 독일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려면 130시간 교육받아야 한다. 교육은 자기를 찾는 과정이다. 삶과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뜻이 있는지, 왜 자원봉사를 하려 하는지 성찰한다. 교육을 시작할 때, 교육 중간에, 그리고 교육이 끝나면 지원자들에게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본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게 너무 힘들면 그만둘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환자를 대하면서 우울증 등 병리 현상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슈퍼바이저는 호스피스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방법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자원봉사 교육비는 건강보험에서 지급된다. 그가 호스피스에 관심 갖게 된 것은 편안한 죽음을 택한 독일인 친구를 보면서다. “췌장암 말기라서 병원에선 더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대로 호스피스 완화의료로 마지막을 보냈는데, 자는 듯이 갔다. 더 이상 치료받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있어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마지막을 보며 나도 언젠간 독일 땅에서 죽을 텐데 저렇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인과 아시아인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죽음을 준비하고 이야기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로 얼마나 준비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데 반해, 한국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은 그게 안 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 열 사람을 동행하면 아홉은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한다. 한 재독 한인은 ‘3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했다. 내일이면 떠날 수도 있는데 담담하게 갈 수 있을까, 나에게도 과제가 될 것 같다.” 환자들과 같은 국적의 자원봉사자들을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까. “필요하면광고지를 각 나라 언어로 인쇄해 호스피스 지원을 원하는 환우와 같은 출신 국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나 레스토랑 등에 뿌린다. 다행히 현재는 단체가 많이 알려져 지원자가 꽤 된다.” 옆을 지키지 못한 사랑하는 이의 죽음 김 전 대표의 삶은 ‘이방인’으로 압축된다. 그는 22살이던 1972년 독일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뒤 이방인의 삶을 살았지만, 한국에서 삶도 이방인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신문기자로 엘리트였다.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던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스무 살에 아이를 가졌는데, 한 여성이 찾아오더니 자기가 본처라고 말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어머니는 나를 지우기 위해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높은 데서 떨어지기도 했다더라. 그런데도 살아남은 내가 얼마나 미웠겠나. 더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아버지를 닮았다더라. 다리도 짧고, 엉덩이도 처지고.(웃음)” 부모의 외면 속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의 삶은 철저하게 외로웠다. 15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론 더했다. 식모살이, 공장 노동자 같은 녹록지 않은 단어들이 신산한 그의 삶을 설명했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는 순간에도 호방하게 웃던 그가 외할머니의 죽음을 언급할 때 휴지를 꺼내들었다. “외할머니는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나를 키우려고 나를 미워하던 어머니를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 내가 공부하고 있으면 할머니도 자지 않고 옆에서 계속 연필을 깎아줬다. 그런 외할머니가 해수병(기침을 심하게 하는 병)을 앓아서 폐에 가래가 찼다. 나는 학교도 가지 않고 할머니를 밤낮으로 지켰다. 그런데 어느 날 따로 살던 엄마가 와서 ‘할머니 보살피고 있을 테니까 영화 구경 갔다 와라’고 하더라. 다녀오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 딱지를 떼고자 한국에 나와 있던 독일인 유엔 직원과 함께 떠났다. 사생아, 낮은 학력, 혈혈단신, 그의 삶이 더 외로워졌다. “그래서 내가 이방인에게 더 관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증의 대상이던 어머니의 마지막도 동행에서 보냈다. “어머니가 수장해달라고 하셔서 12인용 배를 불러 독일 동쪽 바다에 뿌렸다. 유엔 직원이던 계부와 함께 세계를 떠돈 어머니의 삶처럼 유골이 바다로 흩어졌다. 어머니답게 돌아가신 것 같다.” 성소수자이기도 한 그는 최근 나이 든 성소수자로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의 청년 성소수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한국에도 나이 든 성소수자가 있을 텐데 숨었는지 안 나타난다. 그들이 용기를 내서 나서면 젊은 성소수자들에게 힘이 될 것 같다.” 그는 성정체성을 늦게 발견한 편이다. 결혼도 한 번 했다. 교회의 중매로 34살이던 해 파독 광부와 결혼해 7년 정도 살았다. 어느 날 교회 여신도 모임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어느 날 꽃을 주면서 구애했다. 뿅 가게 됐다.” 남편은 ‘(김 전 대표가) 여자를 알아서 이혼한다’고 교회에 소문을 냈다. 한인 사회가 술렁거렸다. 당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김 전 대표는 교수를 찾아가 자신이 신학을 그만둬야 하는지 물었다. “그때 꿈은 목사가 돼서 한국 2세나, 한국 여성 문제를 돕는 걸 사명으로 삼아 일하는 거였다. 교수님이 ‘당신이 자신을 못 받아들이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 ‘하나님은 당신이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당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순간 신학 공부는 계속하고, 이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독일 훔볼트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그때 만난 짝꿍과 30년째 함께 산다. 동행도 짝꿍과 함께 설립했다.
성소수자이기도 한 김 전 대표가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다. 한겨레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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