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2월17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찍은 권오설의 초췌한 모습(왼쪽). 권오설과 김동명이 이면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1925년 12월3일 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 보고서 첫 페이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경석 제공
어떻게 할 것인가? 권오설은 깊이 생각했다.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들의 하는 행세가 붙잡은 자들을 영 내보내지 않을 눈치를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뒤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행이 따라붙은 게 틀림없었다. 답은 자명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비밀결사 동지들을 보호하려면 신속히 잠적하는 것이 옳았다. 잠적이란 경찰 수배망을 피하기 위해 일상활동 공간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지내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가정, 직장, 사회활동과 절연하는 것을 의미했다. 혈연·학연·지연 관계가 있는 사람과 연락하거나 물품을 주고받는 것은 금물이었다.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않는 절대적 잠적과 비밀 활동 지속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계를 유지하는 상대적 잠적이 있었다. 권오설은 후자를 택했다. 공청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공청 집행부는 7명으로 구성됐지만 그중 3명(박헌영·임원근·신철수)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다른 2명(김단야·홍증식)은 때마침 지방에 출장 중이었는데, 검거 사건이 일어났음을 통지받고서 긴급히 피신했다. 서울에 남은 중앙집행위원은 자신과 김동명 둘뿐이었다. 투쟁 일선을 지켜야 할 소임이 자신에게 있었다. 종로경찰서, 권오설 수배망 넓혀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이틀 뒤인 12월2일 종로경찰서 형사대는 다시 권오설 체포에 나섰다. 이날 형사들은 노농총 회관을 전격적으로 수색했다. 견지동 88번지에 있는 노농총 회관은 상임위원 권오설이 줄곧 있었던 숙소였다. 경찰은 그의 사진까지 2장 휴대했다. 회관 내에 머물거나 출입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형사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의 친척 아우이자 고향 후배인, 청년운동계의 신진 활동가 권태동이 희생양이 됐다. 경찰은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간부로 있는 그가 권오설의 거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를 붙잡아 가혹하게 고문했다. 검거가 확산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에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전시 상태’와 같았다. 경남 마산에서 김상주가 검거되고,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체포됐다. 평북 신의주에서는 조리환이 붙잡혔다. 급기야 12월3일에는 잠적 중이던 공산당 중앙간부 김재봉과 김찬의 비밀 숙소마저 노출됐다. 12월11일에는 피신 중이던 공청 중앙집행위원 홍증식이 체포됐고, 평양에서 최윤옥이 검거됐다. 검거 사건은 한 달간 계속됐다. 이듬해 1월 말의 집계에 따르면, 경찰에 체포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모두 22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청 회원은 12명, 공산당원은 9명이었다. 1명은 비당원이었다. 당시 공청 정회원은 212명이었는데, 그중 6%에 해당하는 사람이 수감된 셈이었다. 체포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비중은 컸다. 공청 중앙집행위원 4명(박헌영·홍증식·신철수·임원근), 중앙검열위원(최윤옥·조리환) 2명이 체포됐다. 공산당도 형편이 비슷했다. 수감된 공산당원 9명은 전체 당원 178명에 비하면 5%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앙집행위원 4명(김재봉·유진희·주종건·김약수)과 중앙검열위원 1명(윤덕병)이 포함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과 공청의 최고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둘 다 체포됐다는 점이다. 두 비밀결사의 중앙기관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음이 뚜렷했다. 그뿐인가. 코민테른과 연계를 맡던 국경연락부서도 파괴됐다. 신의주에 거점을 둔 국경연락 책임자들이 수감되고 말았다. 당과 공청 핵심들 줄줄이 잡혀가 권오설은 대담한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검거 사건에 부딪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혁명운동에 처음 참여할 때부터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각오했다고 결기를 표명했다. 그는 검거 사건을 냉철히 분석했다. 비밀결사에 곤란을 주는 측면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전 조선의 운동선 초점이 조선공산당과 공청에 향하게 하는 이익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흥망성쇠가 검거 사건 대응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 난국을 잘 극복하면 조선혁명운동 뿌리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지만, 우물쭈물하면 혁명운동은 적어도 3~4년 정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권오설은 위기에 처한 비밀결사를 다시 일으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수배자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랬다. 첫째, 공청 집행부를 재건했다.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중앙집행위원을 중심으로 후계 집행부를 구성했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 후보 그룹을 4중으로 조직했다. 제1선이 무너지면 제2선 조직이 그를 대행하고, 제2선이 체포되면 제3선이, 제3선이 무너지면 제4선 조직이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청년 사회주의자 28명이 명단에 올랐다. 조두원, 정달헌, 김형선, 장순명, 이걸소, 고광수, 이승엽 등 훗날 사회주의운동의 중진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이 포함됐다. 1선 무너지면 2선이, 2선 무너지면 3선이 둘째, 동요하는 각지의 세포 단체를 안정시키려 했다. 전에 없던 대규모 검거 사건을 보고서 ‘지방 동지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권오설은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머잖아 겨울방학이 시작될 터인데, 그를 활용해 ‘학생 동지’를 지방 운동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도 단위 간부 조직이 없는 곳에 공세적으로 도위원회 선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지방운동 활성화를 전담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2월27일 자로 경기도위원회와 경북도위원회가 설립됐다. 각각 5명으로 이뤄진 간부진이 구성됐다. 마땅히 도지방대회를 소집해 선출해야겠지만, 검거 사건이 진행 중인 비상 시기이기 때문에 부득이 중앙집행위원회가 임명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셋째, ‘표면운동’의 현상 유지 정책을 시행했다. 표면운동이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단체의 활동상을 가리킨다. 비밀결사 구성원은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표면운동을 활용했다. 공청도 그랬다. 그러나 검거 사건으로 여러 공청 회원이 체포되거나 잠적했기 때문에 표면운동은 위축 양상을 보였다. 권오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위축과 좌절을 방어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기세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2월 중에 한양청년연맹이 연구반 정례회를 열고, 재경성 노동단체가 경인지역 노동운동자간친회를 소집하며,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강연회를 여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던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건물. 한국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현재는 종탑만 남아 있다(왼쪽). 1925년 9월24일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적기 게양식. 당시 신문에 “푸른 하늘에 물들인 러시아 국기, 우렁찬 혁명곡에 뱃심 좋게 번득”인다고 대서특필됐다. 한국근대외교사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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