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순이와 순최>. 미국 공보원 필리핀 마닐라 극동지역제작센터. 1953년 7월27일 발행.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옥창준 제공
뒤표지를 보면, 1953년 7월2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5만150부가 제작됐고, 그중 5만 부가 주한미공보원 부산지부로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일이다. 만화작가는 미상이다. 옥창준·김민환은 “만화가의 작화 방식이나 만화에 기록되어 있는 작가 서명 등을 고려할 때 마닐라 소재 극동지역제작센터(마닐라센터)에서 근무하는 미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추정”한다.(백원담·강성현 편,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153~154쪽, 2017년, 이하 쪽수만 표기) 마닐라센터는 미 공보원 상하이지부가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홍콩을 거쳐 마닐라로 옮겨온 것이다. 주로 필리핀과 홍콩, 대만을 중심으로 동남아 지역인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타이·버마 등의 화교를 대상으로 제작했는데, 그런 곳에서 한국전쟁기 ‘적화삼삭’이 배경인 한국어 만화가 만들어진 것은 참 흥미롭다. 연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영어로 작성된 (만화) 텍스트 초본이 여러 국가의 미 공보원 지부에 배분되면, 각 지부에서는 해당 지역 언어로 그 초본을 번역한 것을 덧붙여 오프셋(평판인쇄) 틀을 마닐라센터로 보내고, 센터는 이를 통해 대량 인쇄해 다시 각국의 미 공보원 지부로 발송했다는 거다.(158쪽) ‘가족 위협’ 빨갱이 서사, 만화로 ‘실감 나게’ 만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서울신문> 기자로 피란을 가지 못해 숨어 지내던 융상을 대신해 그의 딸 순최는 먹을 것을 사러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인민군에게 붙들려 성희롱을 당한 뒤 도망치다가 약혼자 동순이를 만나 안전하게 귀가한다. 그 뒤 동순이는 서울을 탈출하다가 붙들려 의용군에 끌려가고, 민청원(빨갱이) 근호는 순최에게 구애하며 접근한다. 순최는 약혼자 동순이의 존재를 언급하며 거절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근호는 순최의 아버지 융상을 ‘반동’으로 끌고 간다. 폭력적인 취조 끝에 융상은 기회를 잡기 위해 거짓 협력하기로 서약하지만, 구금됐다가 평양으로 끌려간다. 그 길에 남한 유격대에 구출되는데, 유격대에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동순이 있었고, 융상과 동순은 유엔군의 서울 ‘수복’ 작전이 전개되는 즈음 집으로 ‘귀환’해, 순최가 근호에게 몹쓸 짓을 당하려는 순간 근호를 사살하고 순최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이런 서사는 한국뿐 아니라 냉전 시기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반공만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공산당이 혁명적 가치를 앞세워 가족을 해체한다는 것은 냉전의 초창기부터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단골 소재”였고, 만화가 이를 실제 이야기처럼 각색하면서 현실성이 더해졌다는 거다. 이 만화에서도 아버지(융상)와 딸(순최)의 관계로 표상되는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빨갱이 근호다. 마지막에 근호를 죽이고 가족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자식 세대의 남성도 반공주의자인 약혼자(예비 가부장) 동순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 서사의 ‘토착성’을 두고 옥창준·김민환은 동아시아의 토착적 맥락에서 나온 거라고 논의한다. 마닐라센터가 반공 심리전에 활용했던 중국 공산화 이후 중국인 가족이 겪는 참상 이야기도 그랬다는 거다.(159쪽) 그렇더라도 이 만화가 한국적 맥락을 강하게 투영하는 건 부동의 사실 아닐까. 융상의 말만 봐도 그렇다. “내 자신이 목도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에 ‘살도’(쇄도의 오기)해온 것은 북조선 인민군이었소!”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굶어 죽으면 죽었지 이북 공산주의자들을 위하여 일하면 안 된다.” 전쟁의 기원으로서 북한 공산주의의 ‘남침’ 야욕과 만행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강교 폭파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게 돼 숨어 살았고, 공산주의자 ‘역도’에게 협력하면 절대 안 되지만, 기회를 엿보기 위해 거짓 협력하고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열렬히 환영하고 이에 기여했다는, “부역자 색출” 광풍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사적인 자기 증명의 서사가 반영돼 있다. 빨갱이 ‘부역자’ 낙인에 대한 공포 서사만큼은 ‘자유세계’를 돌고 돌아도 변형되지 않은 채 한국에 도착했다. <공산 침략과 유엔의 응수>란 만화도 미 공보원이 14쪽짜리 소책자로 만들었다. <동순이와 순최>가 1953년 7월27일 ‘휴전일’에 제작됐다면, 이 만화는 한국전쟁 개전 1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만평’(한 칸 만화) 형식으로 각 만화에 설명글이 달렸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 정권의 ‘남침’을 분명히 고발하고 그로 인한 학살과 파괴, 약탈, 강제 동원 등 공산주의 만행을 밝힌다. 대조적으로 유엔군의 세계 평화를 위한 성전과 영웅적 면모, 압도적 군사력을 부각한다. 해골이 된 ‘북한 괴뢰정권과 군’의 모습과 스탈린이 마오의 ‘중공의용군’을 해골로 가득한 전쟁터로 몰아넣는 모습, 그리고 무기체계의 우수함과는 거리가 먼 ‘인해전술’ 재현 방식이 흥미롭다. 이 만화를 출판한 때는 유엔군이 중국의 춘계 공세를 거듭 막아내면서 전선이 교착된 시기다. 그래서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지 않지만, 유엔군이 적을 단지 막아낸 것이 아니라 “섬멸”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한 대내 심리전 만화다.
<공산 침략과 유엔의 응수>. 미 공보원. 1951년 6월25일 발행. 김현식 소장, 백정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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