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사실 모두 내심 안다. 그 경주는 출발선이 다르다. 어떤 이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어야 한다. 책에 나온 수치만 옮겨도 이렇다. 서울대 신입생의 아버지 65%는 사무직, 전문직, 경영관리직 종사자였다. 비숙련 단순노동자는 0.9%다(2010년 <동아일보> 기사 재인용). 서울 출신 일반고 합격자 70%가 강남, 서초, 송파 출신이었다(2013년 <조선일보> 자료 재인용).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09~2010년 대학을 졸업한 1만4349명을 조사해 발표한 ‘부모의 소득계층과 자녀의 취업 스펙’ 보고서를 보면, 어학연수 경험이 있으면 대기업 취업 확률이 49% 높아지는데, 부모 소득이 월 200만원 미만일 때는 자녀의 어학연수 비율이 10%, 월 700만원 이상일 때는 32%였다. 시험으로 무엇을 검증하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청년은 괴로운 건 컵밥이 아니라 ‘이걸 왜 알아야 하나’라는 의문이라고 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은? 질문이 이러면 이제 변별력이 없어요. 다 알아요. 그래서 을사늑약이 맺어진 방은? 이렇게 물어요.” 그 방 이름을 아는 게 좋은 공무원이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장강명이 쓴 르포 <당선, 합격, 계급>에 2017년 지방직 9급 공무원 임용시험 국어 기출 문제를 예로 들었다. 괄호 안에 들어갈 숫자의 합을 구하는 거다. “쌈: 바늘 ( )개를 묶어 세는 단위. 제: 한약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 한 제는 탕약 ( )첩. 거리: 한 거리는 오이나 가지 ( )개.” 글로 밥벌이하는 장강명 작가도 못 맞히겠다고 했다. 2014년 삼성그룹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 필기시험에는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1. 아침 점심 저녁 2. 5월 6월 7월 3. ㄱ ㄴ ㄷ 4. 가을 겨울 봄 5.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이 중 성격이 다른 걸 고르시오.” 기준에 따라 모든 게 답이 될 수 있는데 한 개만 골라야 한다. 쌈이 바늘 몇 개를 세는 단위인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 실력의 차이는 뭘까? 뭐건 그에 따라 ‘신분’이 갈리고, 한번 갈리면 되돌리기 어렵다. 공정하지 않다고? 컵밥 1천 그릇을 먹고 시험에 붙고 나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질 거다. 공정한 것은 없다는 인정 고통을 통과해 용케 출입구를 찾은 사람은 그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게 괴롭다. 운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안전이 흔들린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화병만 난다. 세상을 바꾸자고 하기엔 엄두가 안 난다. 차라리 자기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믿는 게 속 편하다. 그래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니까. 그렇게 고통의 무한 루프를 돌며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고통으로 남의 고통을 합리화하면서. 공정한 척하는 불공정이 제일 불공정하다. 약자에게 실패의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세상을 뜯어고칠 뾰족한 방법은 없더라도 최소한 인정할 수는 없을까? 이건 정말 불공정해! 만약 당신이 이 게임에서 이겼다면, 운이 큰 몫 했다. 그러니 당신은 갚아야 할 빚이 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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