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김진송ㅣ목수
모르긴 몰라도 우리 집안처럼 몰락한 양반의 집안이라면 더더욱 기승을 부릴 조상숭배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제사니 차례 등등의 절차들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효율적인 사회적 장치이자 종교적인 의례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엔 전통의 회복과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하는 의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고향 혹은 조상 및 전통으로의 귀속감을 가장 강력하게 연결하는 또 하나의 장치가 집안의 족보요, 예의 집안어른의 양반타령이다. 그게 꼭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모인 어른들이 차례상이나 묘자리에 집착하는 버릇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도무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시시콜콜한 간섭이야 어른들의 몫이라고 치부하면 그뿐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런 절차와 형식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이데올로기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과거 양반이었던 조상을 빌미삼아 자식과 후손의 출세를 최고의 가치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의식에서 비롯된다. 양반을 뒤집어 말하면 세도며 권세일 터인데, 그것이 모든 집안의 가치가 되어서는 아무래도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세도를 떨치던 양반이건 몰락한 양반이건 양반의 갓끈 하나를 부여잡으면 그 위세로 집안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조상’이 물려준 최대의 비극일 것이다. 예전의 양반이란 나라의 벼슬을 한 집안을 말하는 것인데 농사나 장사가 아니면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것도 그러하거니와 직업에 귀천이 있는지라 출세하여 나라의 녹을 먹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을 때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옛날이면 모르되 오늘날의 이런 양반타령을 가만 살펴보노라면 아무래도 우리사회의 여러 가지 뒤틀린 현상의 뿌리가 거기가 아닌지 의심 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입신출세하여 집안을 일으킨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거기에 빌붙어 사돈의 팔촌까지 거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말이다. 권력에 줄서기, 뿌리깊은 연고주의와 지역주의도 거기서 연원했을 것이며, 학연이며 족벌이 판을 치는 것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면 과장일까? 누구 하나 권력을 잡았다 싶으면 온 집안의 떨거지들이 이를 등에 업고 일을 벌이는 것이 옛날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오늘날의 양반타령이란 가족이기주의이거나 아니면 출세지상주의의 원형일 수 있다. 가난한 촌구석에서 집안 일으켜 세우려고 고시 패스해 출세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형성된 것은 지난날이라고 해도, 아직까지도 옛날의 출세방식을 꼭 빼다박은 고시에 그토록 열올리는 사회야말로 여전히 의식의 전근대성을 벗지 못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삶의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경쟁과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교육열을 부추기는 풍토 역시 거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미풍양속이라고? 사실 과거의 조상이 한때 나라의 녹을 먹었다는 것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만은 없다. 세도와 권세를 누린 가문일수록 아마 사회에 더 많은 해를 끼친 집안일지 모른다. 족보가 있는 양반집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 후기 폭발적으로 늘어나 전 인구의 반수 이상을 차지한,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집안이 대부분이며, 권세를 누린 진짜 양반이라고 내세워봐야 세도정치와 가렴주구로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 공밖에 더할 것이 없는 집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를 그리워하며 대를 물려 전수되는 가문의 이데올로기는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본류로 작용하기 쉽다. 그런 조상의 음덕을 입은 집안에서 출세에 목을 맨 젊은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 맷돌이 쉴새없이 돌아가는 곳이 바로 거기인 것이다. 그러니 때가 되면 발광하듯이 조상을 기리고 어른을 공경하기 위해 달려가는 길에 민족의 미풍양속이라는 허울을 씌우지 말라. 가문과 집안을 위해 입신출세하려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포기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 그런 양반의 후예이기보다는 상놈의 자손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