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상업계열 특성화고에 다녔던 윤혜영(21·가명)씨는 대학 진학도 생각해봤지만 “학교에서 취업, 취업, 취업하니까”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특성화고는 시도 교육청 평가 지표에 포함된 ‘취업률’에 목맬 수밖에 없다. 혜영씨는 고등학교 1~2학년 동안 무역영어·무역관리사, 전산회계 1급 등 자격증 10여 개를 땄다. 정인아(21·가명)씨도 1학년부터 내신 관리와 자격증 따기에 집중했다. 인아씨는 고등학교 시절을 “3년 내내 취업 준비 때문에 쉬어본 적 없는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대학이라는 ‘학력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 자격증 취득과 내신 관리는 바로 회사의 채용 기준을 넘기 위한 스펙’이다. 내신 등급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회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희망하는 직업이나 적성에 대한 고려 없이 떠밀리듯 노동시장으로 흘러 들어온다. 대졸자들도 금융권과 대기업 등 ‘좋은 직장’에 조기 취업한 이들을 제외하고 어학연수, 자격증 취득, 동아리 활동을 쉬지 않고 이어가며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보고서는 이들이 힘겹게 쌓은 스펙은 실제 일터에서 쓸모없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대다수는 자신의 스펙과 크게 관련 없는 일을 하며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단순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연구 참여자 21명 중 15명이 비정규직·계약직으로, 6명이 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들어갔다. 이들이 첫 번째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평균 146.9만원이었다. 200만원 이상 받은 이는 4명이었다. 20대 초반의 경우 저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주말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통계청의 청년층 조사를 보면 청년층 생애 첫 일자리 가운데 계약직은 25%, 계약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시적인 일자리는 11.7%였다(정규직 일자리는 61.2%). 첫 직장에서 월평균 임금은 50만~99만원 13.5%, 100만∼149만원은 31.1%, 150만∼200만원은 33.8% 등이었다. 조직은 아마추어, 나만 프로? 그럼에도 청년들은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조직이 원하는 일 잘하는 사람과 청년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일 잘하는 사람의 간극은 크다. 보고서를 보면 청년 노동자들은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책임감 있는 행동(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야근과 회식에 적극 참여하고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조직문화를 겪고는 당황한다. 또 이해하기 힘든 일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이름 대신 ‘야’로 불리며 탕비실 청소, 화분에 물 주기, 택배 받기 등 가욋일을 전담한다. “입사했을 때, 한 달 동안 제 이름을 안 불렀어요. ‘야’, 손으로 이렇게 해요. 무슨 개새끼 부르는 것처럼 이래요.”(반도체 설비업체 정규직 정인아씨) 연구 참여자 대부분이 제대로 교육이나 인수인계도 못 받았다. 혜영씨는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세무법인에 정규직으로 취업했지만 “알려주는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상사가 그걸 교육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시스템에서) 이 버튼 누르면 안 되니까, 조심해라’ 같은 내용만 알려줬다.” 여전히 “커피는 여자가 타야 맛있지”라는 말을 듣거나, 복장과 머리 모양의 규제를 받거나, 장난이라며 뒤통수 치는 회사 선배 때문에 속을 앓은 청년들도 있었다. 다수의 청년이 성과 압박과 조직 내 경쟁으로 동료와의 관계에서 어렵다고 호소했다. 직원 5~10명이 있는 작은 사업장에서 일한 김윤지(20·가명)씨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과장이 날마다 던져주는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을 못했을 때 상사들끼리 메신저에서 자신을 욕하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고 스트레스만 쌓였다”고 털어놨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규모가 있는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해도, 나유연(34·가명)씨의 경우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했고, 대기업을 퇴사한 고상철(32·가명)씨는 “학교에서 안 좋은 경영 사례로 배웠던 일이 회사에서 난무했다. 인정을 받으려면 계속 야근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청년 퇴사의 역설 물론 기성세대가 보기에 이 상황은 사회초년생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현재 노동시장에서 과거처럼 참고 견디면 승진하고 월급이 올라가는 ‘비전’을 보여줄 일자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청년들이 일터의 한계를 마주할수록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예비퇴사자로서 삶을 준비한다”고 지적한다. 황은미씨는 “연구 대상자들은 회사에서 경영 상황이 어려우니 ‘참아라’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예전에 다 참고 다녔어’라는 선배들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참고 일하면 좀처럼 나아지는 것은 없고 자신은 소진되는데 경영진들의 배만 불러간다고 느낀다. 자연스레 10년 뒤 내가 선배들이나 팀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자 천주희씨도 “인터뷰한 청년들 대부분이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본인이 언제든 누구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무력감에 시달린다”고 덧붙였다. 결국 청년들은 “결혼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나를 위한 용기”라는 생각에 퇴사를 선택한다. 연구에 참여한 청년들은 여행과 휴식을 통해 퇴사를 회복의 시간으로 여겼다. 보고서에선 “이 유연한 노동환경에서 퇴사가 오히려 청년들을 버티게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기간에도 청년들은 다음에 일을 구할 때 “공백기 동안 뭐 했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므로 늘 불안해한다.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들일수록 ‘부모의 압박’에 부담을 느낀다. 창업이나 혁신적인 일을 꿈꾸지만 결국 첫 직장과 비슷한 회사를 다시 선택하며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한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천주희씨는 “연구 결과를 보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출발(가정 형편, 학력 등)이 다르더라도 결국 노동시장에서 비슷한 처지를 겪는다”고 했다. 퇴사 연구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눠 청년들의 노동 경로를 추적했지만 정규직이더라도 ‘중규직’이라 할 만큼 노동조건이 비정규직에 가까웠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오가는 청년도 많았다는 것이다. 황은미씨는 “좋은 노동환경이 갖춰져야 기성세대가 거쳐간 경로를 걸을 수 있는데, 이게 절대로 안 되니 퇴사와 재취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보고서는 퇴사해도 괜찮은 사회를 위해 현행 비자발적 퇴사자로 자격을 제한하는 구직급여 수급 요건을 완화하고, 구직자를 위한 직업훈련 제도를 확대해 퇴사자의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짜야 한다고 제안한다. 같은 맥락에서 기본소득과 청년수당의 확대도 필요하다. 또 ‘구두 해고’를 당해 해고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노동자도 부당해고 구제를 받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청년 퇴사는 ‘사회적 퇴사’ 사직서 쓰는 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일신상의 이유로(개인적인 사유로) 퇴사하겠습니다”는 문구가 가장 많이 나온다. 실제 사표를 내는 많은 청년이 이 문구를 복사해서 붙여넣는다. 보고서는 “‘일신상의 이유’는 퇴사까지 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부조리와 구조적 문제가 은폐되거나 왜곡된다”고 지적했다. 연구에 참여한 21명은 “불안정한 노동을 피할 수 없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고서는 이제 사회가 청년들이 퇴사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 상황을 공론화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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