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06. 399호>
22년전 나를 찾아와 당돌하게 ‘선배자격’을 실험했던 고교생 홍현웅, 신부가 되어…
80년 늦여름이었다. 내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던 노동운동단체 사무실로 무척 똘똘해뵈는 남녀 고등학생 두명이 찾아왔다. 몇몇 고등학교의 문예반 학생들이 모여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활동을 해오다가 “이제부터는 경험있는 선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던 차에 어느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나를 소개받고, 이제부터는 선배님에게 한수 배우고자 하는데, 자기들이 아직 나를 잘 모르고 있으니 마련해온 질문에 성심껏 답해주면, 돌아가서 의논해 보고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내 면접시험을 치르러 온 셈이었는데 그들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던 당돌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을 돋게 한 질문공세
첫째,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둘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총체적 변혁’과 ‘점진적 개혁’이라는 방식이 있다고 보는데,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가? 셋째, 인간의 영혼을 하나씩 구원하면 결국 이 세상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개인구원론’과 종교인들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데 앞장서서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문제는 나 역시 그 학생들의 정체를 잘 모른다는 거였다. 정체를 모를 때는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해묵은 문제들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선명하게 둘로 가를 수 없다. 양면이 모두 있어야만 온전한 동전이 되듯, 나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본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데, 셔츠를 흠뻑 적실 정도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대 상황과 개인 성향에 의해 그 둘 중 하나를 굳이 자신의 노선으로 선택해야 한다면 선배님은 어떤 입장을 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답했다. “너희들 생각과 똑같아.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아픔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학생들과 나는 파안대소(破顔大笑)했고, 그래도 내 성실한 답변 태도가 좋은 점수를 받았던지 나는 며칠 뒤에 학생들로부터 “합격하셨다”는 통지를 받았다. 문학 소년소녀들의 모임이어서 염무웅, 임헌영의 비평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그들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나는 모임 전날이면 마치 대학입시 수험생의 과외 지도를 하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밤을 꼬박 새워야만 진도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새로 온 신입회원은 엄격한 심사와 가입선서 등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는데 그 모임의 이름은 물론 심사기준과 가입선서의 내용과 형식들은 모두 토씨 하나까지 학생들 스스로의 토론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제는 밝혀도 무방한 그 ‘조직’의 이름은 ‘춘추지대’였고 그 모임의 대표학생은 당연히 ‘회장’이 아니라 ‘대장’이라고 불렸다. 그 학생들 중에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허여멀겋게’ 잘생긴 미소년이 하나 있었다. 토론을 할 때면 말도 별로 없이 빙그레 웃고 있는 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가끔 면도날 같이 예리한 발언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모아가는 재주가 있어서 후배들이 잘 따랐다. <8억인과의 대화>(당시 중국의 인구가 8억이었다)란 리영희 선생의 책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읽던 어느 선배가 바로 그 책이 증거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했던 숨막히는 세상이었는데도, 그 학생은 어느날 토론을 하면서 중국의 최근세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쏟아놓는 바람에 우리 모두를 깜작 놀라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91년에 날아온 두툼한 편지 한통
91년 봄, 나는 그 미소년으로부터 두툼한 편지를 한통 받았다.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오랜 기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더 긴 세월 동안 고해의 바다를 헤쳐가야 하는 가톨릭 신부가 된다는 소식이었다. 자신이 사제로 서품받는 미사의 날짜와 장소 그리고 신부가 돼 드리는 첫 미사에 대한 안내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신부가 마흔살쯤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느라고 잠을 설쳤다. 한때,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부끄럼 없이 걷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길에서 내려와 길가에라도 남아 있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막 그 길에 들어선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는 분명 마흔살쯤 나이가 되어서도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나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약속은 “최소한 길을 막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노라”는 말뿐이어서, 길을 걷다가 혼자 울었다.
지난해 여름, 전교조 인천지부 선생님들과 수련회를 하면서 나는 ‘춘추지대’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말끝에 그 신부님의 이름이 ‘홍현웅’이라고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선생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안다”는 표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신부님이 인천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거였다. 강의가 끝났을 때 한 여자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 신부님을 뵐 때마다 항상 ‘저 깊은 생각의 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것이 궁금했는데…. 아, 고등학생 때부터 그러셨군요.”
내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하얀 청년이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미남인가요?”라고 물으니 그 선생님은 두손을 치마폭 앞에 마주 잡으면서 거의 외치다시피 말하는 것이었다. “어유 점점 더 멋있어지고 있어요.”
그 ‘홍안의 미소년’이었던 신부님도 이제 마흔살을 넘겼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어서야 우리는 단 몇 시간만이라도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몇년 전 어느 식당에서 스치듯 한번 마주쳤던 것이 20년도 더 흐른 세월 동안의 유일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홍현웅(41) 신부는 현재 ‘인천교구 가톨릭청소년회 전담신부’이다. ‘인천시 청소년쉼터’의 운영실장과 ‘연수구 청소년수련관’의 관장을 겸직하고 있다.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등 지역단체 일도 꽤 많이 거들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훌륭한 사람을 우리 사회가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우리가 만난 ‘청소년쉼터’는 글자 그대로,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는(우리 사회에서는 그 사정을 그냥 쉽게 ‘가출’이라고 표현한다) 청소년들의 ‘쉼터’이다. ‘가출’청소년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곳에 들어와 신부님을 비롯한 상담 전문 직원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음 과정을 준비하는 것이다. “청소년 문제는 결국 ‘청소년들이 당하는 문제’”라는 홍 신부의 표현이 가슴을 때렸다.
청소년 개개인을 ‘미디어’가 되게 하자
홍 신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더니 짧은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예쁘장한 학생이 들어왔다. 막연히 여학생일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새로 들어오는 남학생”이라는 것이다. 홍 신부는 일어서 가더니 마치 잘 아는 사이처럼 “어서 와”라고 말하면서 그 학생의 뒷머리를 툭툭 치듯 쓰다듬었다. 그 태도가 너무 스스럼없어서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반말해도 돼?”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찾아왔던 학생들이 몇 개월 뒤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가 제일 기쁘다고 한다.
‘청소년수련관’에서 하는 일들은 한마디로 홍 신부가 20년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이다. 학교의 교육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청소년들의 인식 욕구를 청소년수련관의 다른 활동 속에 담보하는 것이다. 그 사업내용을 설명하는 홍 신부의 표현 중 하나만 옮겨보자. “청소년들이 자본주의 사회 ‘미디어’의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청소년 자신이 곧 하나의 ‘미디어’가 되어 ‘미디어는 곧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거지요.” 홍 신부는 어릴 적 자신이 했던 그 고민들을 20년 동안 가슴에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보니, 내 자신의 추억에 버거워 홍 신부의 훌륭함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이번 글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지만, 할 수 없다. 잠시라도 학생 시절의 그를 알고 지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운 걸 어쩌랴. 언젠가 ‘홍현웅 신부 2편’을 쓰게 될 날이 있기를 바란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홍현웅 신부. 잠시라도 학생시절의 그를 알고 지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럽다. (박승화 기자)
첫째,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둘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총체적 변혁’과 ‘점진적 개혁’이라는 방식이 있다고 보는데,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가? 셋째, 인간의 영혼을 하나씩 구원하면 결국 이 세상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개인구원론’과 종교인들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데 앞장서서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문제는 나 역시 그 학생들의 정체를 잘 모른다는 거였다. 정체를 모를 때는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해묵은 문제들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선명하게 둘로 가를 수 없다. 양면이 모두 있어야만 온전한 동전이 되듯, 나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본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데, 셔츠를 흠뻑 적실 정도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대 상황과 개인 성향에 의해 그 둘 중 하나를 굳이 자신의 노선으로 선택해야 한다면 선배님은 어떤 입장을 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답했다. “너희들 생각과 똑같아.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아픔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학생들과 나는 파안대소(破顔大笑)했고, 그래도 내 성실한 답변 태도가 좋은 점수를 받았던지 나는 며칠 뒤에 학생들로부터 “합격하셨다”는 통지를 받았다. 문학 소년소녀들의 모임이어서 염무웅, 임헌영의 비평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그들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나는 모임 전날이면 마치 대학입시 수험생의 과외 지도를 하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밤을 꼬박 새워야만 진도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새로 온 신입회원은 엄격한 심사와 가입선서 등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는데 그 모임의 이름은 물론 심사기준과 가입선서의 내용과 형식들은 모두 토씨 하나까지 학생들 스스로의 토론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제는 밝혀도 무방한 그 ‘조직’의 이름은 ‘춘추지대’였고 그 모임의 대표학생은 당연히 ‘회장’이 아니라 ‘대장’이라고 불렸다. 그 학생들 중에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허여멀겋게’ 잘생긴 미소년이 하나 있었다. 토론을 할 때면 말도 별로 없이 빙그레 웃고 있는 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가끔 면도날 같이 예리한 발언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모아가는 재주가 있어서 후배들이 잘 따랐다. <8억인과의 대화>(당시 중국의 인구가 8억이었다)란 리영희 선생의 책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읽던 어느 선배가 바로 그 책이 증거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했던 숨막히는 세상이었는데도, 그 학생은 어느날 토론을 하면서 중국의 최근세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쏟아놓는 바람에 우리 모두를 깜작 놀라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91년에 날아온 두툼한 편지 한통

사진/ '연수구청소년수련관'의 청소년들과 담소하는 홍 신부. 여기서 하는 일들은 한마디로 그가 20년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