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을 통과한 첫 유엔군 부대가 역사적인 돌파를 기념해 국군 제3사단이 만든 푯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50년 9월29일 F.윈즐로 촬영
기왕 전설 같은 일화이니, 사진 이야기를 보탤까 한다. 누구나 어디선가 한번쯤 봤을, 국군 제3사단의 38선 돌파를 증거하는 유명한 사진(위쪽)이다. 전설 같은 일화에 대한 보조 이미지로 이해해야 할까? 그러나 이 사진은 독립적인 중요 자료로 분석돼야 한다. 이 사진은 1950년 9월29일 주한미군사고문단 사진장교 윈즐로 중위가 찍었다. 뜻밖에도, 이 사진만 놓고 보면, 38선 돌파는 9월29일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사진 설명에 “38선을 돌파하는 첫 유엔군 부대가 이를 공표하는 표지판을 들고 있다. 이는 한국군 3사단이 38선 돌파라는 역사적 돌파를 이루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쓰여 있다. 38선 돌파, 이승만의 친필 명령 사진을 보면, 국군 3사단 참모들과 미군 고문단이 함께 웃으며 서 있다. ‘38’을 손으로 가리키는 미군 장교는 에머리치 중령이다. 정중앙에는 23연대 부연대장 서정철 중령이 앞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그 옆에 총을 든 밀러 상병의 오른쪽에 38선 돌파의 주역 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이 웃고 있다. 정치권력만 바라보고 주특기라곤 민간인 학살밖에 없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대령 대신 김종순 대령을 23연대장으로 적극 추천한 이가 바로 에머리치였다. 9월29일 서울 중앙청에선 서울 ‘수복’과 ‘환도’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서울 시내에서 ‘잔적 소탕’이 끝나지 않았고, 중앙청은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때 이른 기념행사였지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수복된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환’하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은 대한민국 영토를 회복했고 “침략으로 붕괴된 평화를 다시 세웠다”. 맥아더 장군과 유엔군은 38선에서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38선을 돌파해 북진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날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 없이 북진해야 한다”고 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유엔이 아직 38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며 주저했다 한다. 여러 자료와 연구를 보니 맥아더 장군의 속내는 달랐던 게 분명하다. 38선 돌파 문제는 미군과 한국군이 암울하게 후퇴를 거듭했던 7월 중순부터 미국 내에서 뜨겁게 논의됐고,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국무부에서 갈등했던 사안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올라와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9월1일 완성된 NSC-81(‘한국에 관한 미국의 행동 절차 보고서’)과 그 수정본으로 9월11일 승인된 NSC-81/1이다.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방침이 맥아더 장군에게 공식 전달된 것은 ‘서울 환도’ 기념식 하루 전인 9월27일이다. 필요하다면, 상부 기관인 합참뿐 아니라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도 갈등을 마다하지 않던 맥아더였다. 마음속으론 몇 번이고 38선을 돌파하지 않았을까. 그런 맥아더조차 미국의 38선 돌파 결정이 영국 등 우방국에도 인정돼 유엔 차원에서 공식 결정이 되는 걸 기다려야 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제3차 세계대전 우려 단지 38선을 둘러싼 결정이 아니라 유엔의 권력 구조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후마니타스 펴냄) 저자인 김학재의 논의는 흥미로운 사실을 환기해준다. 38선 돌파는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단지 침략을 막는 것을 넘어 공세적인 군사적 반격을 통해 역으로 침략하고 점령하는 것을 뜻했다. 방어전으로 38선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평화와 안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에 유엔의 더 적극적인 군사개입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한국 처지에선 북한이 해방과 통일을 명목으로 ‘남침’을 했으니, 전세가 뒤집어진 상황에서 같은 명목으로 ‘북진’을 주장하는 게 뭐가 문제냐 반문하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유엔 내부의 사정은 더 복잡하고 갈등적이었다. 영국 등 유엔군을 구성한 자유 진영조차 복잡한 심경으로 애끓었다. (방어) 전쟁을 치러서라도 양차 대전의 참화를 좌시하지 않고 평화와 안전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자칫 또 다른 공세적인 군사적 침략과 점령으로 변질되진 않을지, 38선 돌파가 정당화되면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해 제3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으로 확대되진 않을지, 38선 이북 지역의 점령과 통제가 어떤 어려움으로 나타날지 전쟁 전 군정 시기 등을 떠올리며 걱정과 우려가 태산 같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유엔군의 ‘38선 통과’를 승인한 10월7일 결의안이 통과되자 중국은 그전에 수차례 경고한 대로 참전 방식으로 ‘개입’했다. 중국은 38선 돌파를 미국의 북한 침공으로 규정했고, 중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10월8일 중국인민지원군을 투입하는 최종 명령을 내렸다. 10월19일 중국군 25만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소련군이 지상전에 투입되진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공군 참전이 있었음은 제법 알려져 있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망령처럼 떠돌아다녔을까? 이를 “기꺼이 감수해서라도”라고 생각했던 군 수뇌부도 일부 있었지만, 대체로 세계적 냉전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온건하게 풀려는 국무부가 주도권을 잡았다. 38선 이북 지역의 점령과 통제는 짧았지만, 그 몇 배의 시간으로도 회복하기 어려운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38선 이남에서 그랬듯이, 38선 이북 지역에서도 한국의 ‘수복’과 북한의 ‘해방’이 교차되는 상황은 전쟁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던 주민들을 ‘반동’과 ‘부역자’로 낙인찍었다. 심지어 주민들 간에도 남북 두 정부와 진영의 후원 아래 보복 양상의 잔인한 대규모 폭력이 가해졌다. 많은 주민이 학살됐고, 살아남은 자들도 사회적 관계와 삶은 철저히 파괴됐다. ‘신천 학살’을 배경으로 한 황석영의 소설 <손님>(창비 펴냄)은 한편으론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다른 한편으론 38선 돌파가 초래한 인간성에 대한 대량 파괴를 들여다보고 있다. 38선 돌파를 기념한다는 것은 전쟁 발발을 기념하는 기억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38선 이북에 ‘멸’해야 할 적이 있으며, 언젠가 북진반공통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정치다. 새로운 기념일을 기다리며 ‘종전’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시작 중 하나는, 국군의 날을 38선 돌파라는 시점과 연루시킨 기념의 정치로부터 해방시켜야 하지 않을까? ‘10·1’, 더 나아가 ‘6·25’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기념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야 할 기표다. 그렇지 않으면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더라도 38선은 여전히 분단(분리)과 적대·증오의 흔적으로 강력히 작동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탈분단 평화는 요원하다. 새로운 국군 창설의 날과 종전일을 기다린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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