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산악인 합동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훈 대원, 임일진 촬영감독, 김창호 대장, 유영직 대원, 정준모 한국산악회 이사. 연합뉴스
이로써 국내 산악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시야는 여느 산악인들과 달랐다. 언론의 조명을 받는 유명한 산의 등반이 아니라 아직 초등이 안 된 산, 알피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산을 찾았다. 2000년부터 2008년 사이 여덟 차례나 파키스탄, 트랜스히말라야(카라코람산맥)를 찾았다. 그리하여 바투라, 히스파, 비아포, 발토로, 시아첸 등 인더스강 북쪽의 수많은 빙하를 탐사했다. 이때 그의 모습은 카라코람산맥 탐사에 크게 공헌한 19세기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마틴 콘웨이 탐험대와 다를 바 없었다. 원정 등반 분야의 FA 선수 그러는 사이사이 등반도 하고 성과도 냈는데, 2001년 ‘멀티피크 원정’이 그 첫걸음이다. 지금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체인 유라시아트렉을 운영하는 서기석과 최석문, 이명희, 임성묵 등과 함께 카체브랑사(5560m)를 초등하고 혼보로(5620m)와 시카리(5928m)에 신루트를 냈던 게릴라 원정이었다. 그의 정보력과 서기석의 조직력이 합작한 결과였다. 2004년에는 한국도로공사 로체 남벽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웬만해서는 다른 팀 사람을 끼워주지 않는 국내 원정 풍토에서 그는 자유계약(FA) 선수, 꼭 데리고 가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8천m 위아래에서 피켈(T자 모양 얼음도끼)을 휘두르고 배낭에 든 자일을 풀어가며 선등(앞서서 등반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도로공사 팀과는 이듬해에도 같이 자일을 묶었다.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이었는데 여기서 이현조와 함께 메스너의 길을 따라 횡단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무려 35년 만의 재등, 그는 여기서 저 외로운 선구자의 냄새를 실컷 맡았다. 메스너가 그랬던 것처럼 올랐던 길을 포기하고 그 또한 반대편으로 하산해야 했고, 메스너가 동생을 잃었던 것처럼 훗날 이현조를 히말라야에서 잃었다. 하지만 열네 고봉 완등자 같은 화려한 등반만 좇는 한국 풍토에서 언제까지나 ‘외로운 늑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2006년 드디어 초심을 꺾고 엄홍길이나 박영석의 길을 따라갔으니 바로 가셔브룸1·2봉 연속 단독 등정이었다. 국내 등반 사상 초유의 일로 동아대산악회 원정대에 얹혀서 등반 허가를 받았기에 가능했다. 자신에게는 변절이었던 8천m 레이스는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잘나갔다. 2006년 K2, 2007년 브로드피크, 2008년 마칼루와 로체, 2009년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2010년 칸첸중가와 두 번째 낭가파르바트, 2010년 시샤팡마, 2011년 안나푸르나와 두 번째 가셔브룸1·2, 초오유, 그리고 2013년 에베레스트였다. 부산 산악계가 추진하는 ‘다이나믹 부산 희망원정대’에 편승했기에 가능했다. 늦둥이 딸 하나 남겨놓고… 외도가 끝나자 김창호는 이내 알피니스트로 돌아왔다. 2016년부터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첫 사업으로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신루트를 냈고 이로써 유럽 산악계 최고의 명예인 황금피켈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나아가 2017년에는 인도 히말라야의 다람수라(6446m), 팝수라(6451m)에 신루트를 낸바 이번에 참변을 당한 구르자히말 원정은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렇게 산에만 미쳐 돌아다니다 그는 마흔 넘은 나이에 산악회 후배와 결혼했다. 그리고 2세 탄생 가능성이 얼마나 궁금했으면 10년이나 선배인 나에게 쑥스러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도 그처럼 늦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마흔 이후에도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결국 그는 ‘단아’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원정 갈 때마다 텐트에서 대원들 몰래 그 딸의 동영상을 열어보았다. 그 딸을 두고 그는 갔다. 박기성 전 <사람과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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