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의 민족지
등록 : 2002-03-06 00:00 수정 :
3·1절 아침 ‘민족지’ 조선·동아일보는 신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날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은 광복 57년 만에 대표적인 친일인사 708명의 명단과 친일행각을 공표했습니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학계와 광복회의 자문을 받아 오랜 작업 끝에 친일행위자를 선정 공개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당연히 누가 친일인사에 포함됐는가, 곧 708명의 명단이 가장 중요한 ‘팩트’입니다. 그러나 다른 신문들과 달리 두 신문은 명단을 싣지 않았습니다. 또 광복회와 의원모임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을, 유독 두 신문은 정치적 감정적 의도가 있는 것처럼 왜곡했습니다.
두 신문이 약속이나 한 듯이 중심을 잃은 것은 옛 사주들이 친일인사에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만일 조선 사주 방응모, 동아 창업주 김성수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두 신문은 명단도 싣고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방응모만 포함됐다면 동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고, 김성수만 포함됐다면 조선이 이성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민족과 역사의 문제라도 사주의 명예나 이익에 우선될 수 없다”는 족벌신문의 굳건한 존립원칙을 분명히 드러내보였습니다.
광복회가 의원모임에 넘긴 친일행적 자료를 보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가 되고, 43년에는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고 고사포를 사서 일본군에 기증합니다.
그는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시다’, ‘대동아 전쟁의 성전의식’ 같은 글을 싣고, “구한국의 운명이 위급존망지추에 있을 때 일한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합병의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일합방을 찬양했습니다. 광복회는 그를 언론을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정책의 하수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1920년 지주들과 동아일보를 창립한 김성수도 방응모처럼 국민정신총동원 발기인,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등을 맡아 전쟁동원에 앞장섭니다. 그는 기고와 연설을 통해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고 앞장섭니다. 광복회는 그의 학병·징병 동원활동이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음에 놀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방응모와 김성수가 공이 있다고 해서, 이런 과를 덮거나 과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별다른 표현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이들 신문의 영향력은 무척 컸다고 합니다. 따라서 친일은 이른바 민족지를 자처하는 신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입니다.
일제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언론이 민족해방이라는 최대의 과제를 놓고 양보할 수 있는 한계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무엇이었던가? 논의의 시발점이 됐으면 합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민족지 대접을 받아 마땅합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