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소리 들으려 배낭을 꾸린다
등록 : 2002-02-27 00:00 수정 :
그날 비가 내렸다. 비를 피해 한적한 2층 다방으로 숨어들었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씁쓸한 커피잔을 기울였다. 문득 아득함이 밀려왔다. ‘생을 이렇게 맴돌기만 하다니, 이건 죄악이야.’ 집어던지듯 찻값을 내고 회사로 돌아왔다. 사표를 썼다.
윤재헌(52)씨는 이렇게 ‘배낭족 여행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살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1987년 일이니, 벌써 15년째에 접어들고 있네요.” 유명 제과회사의 지점관리 책임자 자리를 박차고 떠난 첫 여행지는 일본과 동남아였다. 1년 가까이 히치하이크와 지붕 밑 노숙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좋기만 했습니다. 자유로웠습니다.”
첫 여행의 기록을 모아 <배낭족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배낭족 1세대인 그의 여행기는 1988년 해외여행 자율화를 맞이한 숱한 젊음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도대체 내가 속하지 않은 또다른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온 세상을 마음껏 껴안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세상을 다 보고 죽을 수만 있다면 더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본 세상 중 그를 가장 매혹시킨 곳은 다름 아닌 인도였다. 무려 다섯번을 다녀왔다. “유럽에서 마신 커피에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세상의 시스템이 제공하는 음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도에선 50전짜리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눈물이 난다. 젊은 날의 내가 품었던 욕망과 부의 덧없음을 눈물겹도록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눈물겨운 인도의 체험을 그는 최근 한권의 책으로 모아 펴냈다. <나는 다시 인도로 떠난다>(산해 펴냄, 02-738-2201)에서 그는 “신과 인간, 태고의 전설과 땀내나는 현실이 공존하는 나라”의 추억을 향내짙은 문장으로 되살려낸다.
그런 그가 지금 오랜 여행의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인도네시아의 거대도시 자카르타의 최중심가에 있는 한국식당 ‘이스타나 코리아’가 그의 거처다. “오랫동안 발만 동동 구르던 아내와 부모님의 안쓰런 모습이” 그를 타향에서나마 일상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래도 마음은 늘 바람이다. “곧 떠나야지요.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최북단 이집트까지 도보로 종단할 겁니다.” 그는 “지금 이순간도 척박한 땅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