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가대표팀이 7월15일(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미드필더 폴 포그바는 기니에서 프랑스 파리 외곽 도시로 온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미드필더 은골로 캉테는 말리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아들이다. 수비수 사뮈엘 움티티는 카메룬에서 태어나 2살 때 프랑스로 건너왔다. 이들을 포함해 프랑스 국가대표팀 21명 중 17명이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의 이민자였다. 역사상 두 번째로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린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처음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팀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우승 멤버 22명 중 12명이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지네딘 지단은 1953년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 온 알제리 이민 가정 출신이고,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인종과 출신국의 다양성이 주목받았던 1998년 프랑스 대표팀은 프랑스의 삼색기인 ‘블뢰, 블랑, 루즈’(파란색, 흰색, 붉은색)를 패러디한 ‘블랙, 블랑, 뵈르’(흑인, 백인, 아랍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랑스 사회에서 커지는 이민자와의 갈등 다국적 축구팀의 월드컵 우승은 프랑스의 이민자와 갈등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2005년 봉디를 포함한 방리유에서 흑인과 아랍계 청소년을 주축으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죄 없는 십 대 소년 3명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 변전소로 잘못 들어가 2명이 감전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프랑스 전역의 이민자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실업 등 누적된 불만이 폭발했다. 2개월의 소요 사태로 건물 300채와 차량 1만 대가 불탔고, 3천 명이 체포됐다. 1998년 월드컵 우승 이후 다양한 인종의 조화에 열광했던 프랑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유다. 2015년에는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만평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파리의 시사풍자지 <샤를리 에브도> 편집국에 난입해 총기를 난사, 편집장 등 12명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 여론이 더욱 악화됐다. 바타클랑 극장에서는 이슬람국가(IS)의 총격 테러로 시민 9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6월에도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20대 흑인 청년이 검문을 받다가 경찰 총에 맞아 숨진 뒤 대규모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전세계 언론들은 악화를 거듭한 프랑스의 반이슬람·반난민·반이주민 정서가 축구대표팀의 러시아월드컵 우승을 계기로 바뀔 수 있을지 주목한다. 프랑스 진보 성향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거리로 몰려나온 수백만의 축구팬들이 선수들의 출신을 개의치 않고 삼색기를 흔들며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출신지가 어디든 모두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 영웅들”이라고 표현했다. 《CNN》은 “지구상 어떤 나라든 이민자가 비이민자와 같은, 세계 공동체의 시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은 이민이 우리 모두를 위한 더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미래를 향한 키를 쥐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순위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터키 출신인 독일의 공격수 메수트 외질, 가나계인 독일의 수비수 제롬 보아텡 등도 이민자 출신 선수들로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여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골든볼 모드리치는 난민 출신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크로아티아의 준우승을 이끌고 월드컵 최고 선수상인 골든볼을 받은 루카 모드리치는 전쟁 난민 출신이다. 1991년 일어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때 할아버지가 세르비아 민병대에 목숨을 잃었고, 집이 불탔다. 모드리치는 이때부터 7년 동안 난민 생활을 했다. 인구가 420만 명에 불과한 크로아티아의 월드컵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은 1등 공신 모드리치는 조국에서 ‘왕’이 아니라 ‘신’의 반열에 올랐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평가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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