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이래 미국의 도덕적 헤게모니가 이처럼 허물어진 적은 없을 것이다.
지난 1월에 필리핀에 다녀왔다. 전에는 친지나 방문객을 기다리는 환영객들로 꽤 시끌벅적하고 활기찼던 마닐라 공항이 텅 빈 느낌이었다. 공항 문에서 20여m 떨어진 곳까지 접근을 금지하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무장을 한 경찰들이 일반인들의 공항 접근을 가로막고 있었다. 필리핀 남부 바실란 섬의 이슬람 조직인 아부 사야프가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조직과 연루됐다는 주장을 미국이 제기하면서, 대테러 전쟁을 벌이기 위해 미국 특수부대 요원을 파병한다는 발표가 난 직후였다. 곧 미국은 필리핀군과의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660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대테러 군사훈련에 돌입했단다. 얼마 전에 필리핀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한국에 왔다. 그에 따르면, 그 이후 변한 것은 바실란 섬에 대규모의 매매춘이 성행하게 된 것과 이동의 자유를 상실한 지역 주민들의 생계가 더욱 곤란해졌다는 것뿐이란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에 의해 제기된 ‘연루설’의 진실 여부를 알고 있지 못하다.
비판자는 반역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라크와 북한을 포함한 몇 나라가 미국 대통령에 의해 ‘악의 축’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정권들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로 미국을 위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며,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자기 방어를 선언했다. 미국이 ‘선악’의 메타포로 다른 국가들을 규정하는 것은 미국 스스로가 자신을 전지전능한 심판관으로 위치시키겠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간의 외교적 게임의 규칙들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미 미국의 ‘언어’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돼버렸다.
9·11 사건 이후 내가 ‘미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의구심들이 최근 현실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유, 민주, 인권국가로 자부해오던 미국의 대통령이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보는 TV 앞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살해’할 것을 명령할 때부터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적 공격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이 보내는 지지율은, 미디어의 조작 여부를 고려하더라도, 섬뜩한 수준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텔레반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고, 필리핀과 소말리아로부터 ‘빈곤’을 뿌리뽑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리핀의 바실란 섬은 매춘을 통한 여성 억압과 빈곤의 심화를 경험하고 있다. 항구적인 동원체제를 선포한 미국사회는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축적해온 자기 비판의 힘마저 잃어가고 있다. 진보적인 대학으로 꼽혔던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협박메일을 받고, 반역자로 매도된단다. 애국심을 보이는 것과 불안과 의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구별이 된다. 그러나 9·11 사건은 이 둘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도덕적 ‘혼돈’을 미국사회에 유포시킨 듯싶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때, ‘정의’의 개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미국사회가 또 한번의 애국심 고양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는 동계올림픽에서도 국가간 게임의 규칙들은 종종 무시된다. 김동성 선수의 ‘실격’ 판정에 의의가 제기될 경우, 중재위원회 등의 적절한 기구를 통해, 관점의 ‘차이들’이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했어야 했다. 미국이 정한 게임의 규칙은 분명 타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었고, 미디어의 반응은 ‘유치한’ 수준이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에 대한 무모한 공격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연민에 기반한 ‘보상’에 대한 요구를 통해, 9·11 사건을 극복해가고 있다. 미국의 전형적인 우월주의가 과도한 자기 연민과 결합될 때, 퇴행적 나르시시즘이 생겨날 수밖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적 해결방식이 미국 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불행의 기운들을 퍼뜨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평화를 열망하는 세계 시민 9·11 사건 이후 미국사회가 구축해내는 ‘신질서’는 동의를 통한 지지를 의미하는 헤게모니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만들어내는 폭력들, 즉 구체적인 전쟁의 위협과 언어를 통한 상징적 폭력들은 세계의 시민들로 하여금 더욱더 ‘평화’에 대해 열망하게 만든다.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이래 미국의 도덕적 헤게모니가 이처럼 허물어진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개념의 글로벌 정치학은 ‘미국식 규칙’이 아닌, 이제까지 미국에 의해 ‘열등한 타자’로 인식되어왔던 국가의 민주 시민들간의 대화와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이를 위해 우선 내 인식과 감정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아왔던 식민지적 멘털리티를 점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사진/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문화인류학
9·11 사건 이후 내가 ‘미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의구심들이 최근 현실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유, 민주, 인권국가로 자부해오던 미국의 대통령이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보는 TV 앞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살해’할 것을 명령할 때부터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적 공격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이 보내는 지지율은, 미디어의 조작 여부를 고려하더라도, 섬뜩한 수준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텔레반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고, 필리핀과 소말리아로부터 ‘빈곤’을 뿌리뽑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리핀의 바실란 섬은 매춘을 통한 여성 억압과 빈곤의 심화를 경험하고 있다. 항구적인 동원체제를 선포한 미국사회는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축적해온 자기 비판의 힘마저 잃어가고 있다. 진보적인 대학으로 꼽혔던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협박메일을 받고, 반역자로 매도된단다. 애국심을 보이는 것과 불안과 의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구별이 된다. 그러나 9·11 사건은 이 둘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도덕적 ‘혼돈’을 미국사회에 유포시킨 듯싶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때, ‘정의’의 개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미국사회가 또 한번의 애국심 고양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는 동계올림픽에서도 국가간 게임의 규칙들은 종종 무시된다. 김동성 선수의 ‘실격’ 판정에 의의가 제기될 경우, 중재위원회 등의 적절한 기구를 통해, 관점의 ‘차이들’이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했어야 했다. 미국이 정한 게임의 규칙은 분명 타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었고, 미디어의 반응은 ‘유치한’ 수준이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에 대한 무모한 공격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연민에 기반한 ‘보상’에 대한 요구를 통해, 9·11 사건을 극복해가고 있다. 미국의 전형적인 우월주의가 과도한 자기 연민과 결합될 때, 퇴행적 나르시시즘이 생겨날 수밖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적 해결방식이 미국 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불행의 기운들을 퍼뜨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평화를 열망하는 세계 시민 9·11 사건 이후 미국사회가 구축해내는 ‘신질서’는 동의를 통한 지지를 의미하는 헤게모니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만들어내는 폭력들, 즉 구체적인 전쟁의 위협과 언어를 통한 상징적 폭력들은 세계의 시민들로 하여금 더욱더 ‘평화’에 대해 열망하게 만든다.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이래 미국의 도덕적 헤게모니가 이처럼 허물어진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개념의 글로벌 정치학은 ‘미국식 규칙’이 아닌, 이제까지 미국에 의해 ‘열등한 타자’로 인식되어왔던 국가의 민주 시민들간의 대화와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이를 위해 우선 내 인식과 감정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아왔던 식민지적 멘털리티를 점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