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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시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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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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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한반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AFP 연합)
부시를 맞는 서울은 초등학교 시절 장학사의 행차를 떠올리게 합니다. 운동장 구석구석을 쓸고, 예행연습을 되풀이하고, 평가와 훈화에 온 귀를 쫑긋합니다.

부시의 한마디는 ‘말씀’이 되어 뜻풀이가 이뤄지고 그가 간 뒤에 학교는 일희일비하게 될 것입니다(장학사 방문이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경기교육청의 고교배정 오류사건으로 볼 때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가 도라산역에서 북한에 강성 메시지를 보내면 남북한의 선택은 좁아지고 한반도는 위축될 것입니다. 그가 유화 제스처를 취하면 긴장된 분위기는 조금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 당국자와 정치인들은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떠들든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부시의 경고가- 김정일이 돌지 않았다면- 설득력이 없고, 말을 안 듣는다고 미국이 북한을 바로 치는 것도- 부시가 미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부시로부터 진전된 대북 발언을 이끌어낸다 해도 일시적 봉합일 뿐 정책변화의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시는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해왔던 것처럼 북한에 대해 대화의 여지는 남겨두고 압박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하는 것보다 언제까지 미국 눈치를 보고 부시의 말에 일희일비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것에 마음이 걸립니다.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조기경보기를 앞세워 휴전선 앞에 선 부시는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장학사 정도가 아니라 막가는 점령군일 것입니다.

사회단체, 학생들이 부시반대 시위를 벌이고 일부 언론이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국과 정치권은 끽소리를 못합니다.


미국은 북한 위협을 부각시켜 미사일방어체제 국방비 증액의 명분을 살리면서 테러와의 전쟁 지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이란만 ‘악의 축’이라고 하면 중동의 반발을 사니까 북한을 끼워넣었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돌이키면, 미국이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격입니다. 한국에는 차세대 전투기 구매압력의 효과도 노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자신의 이익 관철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간의 자존심과 상식만 있어도, ‘부시에의 동조’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보수정객과 언론들은 한미공조에 금이 가면 난리가 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따져보면 그 뿌리는 주한미군의 주둔, 미국에 대한 군사적 종속에 있습니다. 또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이 미국에 ‘노’라고 하지 못하고, 미국이 정보공작정치의 힘으로 국내 정치에 간여하기 때문입니다.

부시는 이런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큰 훈화를 남겼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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