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들의 삶의 애환을 다룬 영화 <피와 뼈>(위쪽)와 <박치기>. 해방 이후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의 신산한 삶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다. 네이버 무비/ 네이버 무비
조경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논문 ‘불완전한 영토 밖의 일상’(<주권의 야만>, 2017)을 보면, “제주도인들의 도일의 가장 큰 배경은 궁핍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빈곤층의 확대”라는 계급적 요인이 가장 컸다. 실제 육지의 다른 지역보다 일본에 도항한 제주도인들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컸다. 2009년 일본 법무성 자료를 보면, 일본에 사는 조선·한국 국적자 57만8495명 가운데 제주 출신은 9만882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도 전체 인구 52만8411명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1945년 8월 해방으로 한반도는 독립됐다. 이로써 대일본제국의 일부를 구성하던 내지(일본)와 조선 사이에 전에 없던 ‘국경’이 만들어진다. 제주4·3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밀항이라는 위험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은 2006년 일본 연구자 오구마 에이지와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함께 펴낸 인터뷰집 <자이니치 1세의 기억>에서 자신의 일본 도항 배경을 설명한다. 1929년 12월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시종은 어린 시절 제주에서 자랐다. 일본의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받은 김시종은 ‘일본은 신국이며, 천왕은 신’이라 믿었던 군국 소년이었다. 해방은 그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충격에 못 이겨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하던 군국 소년은 새 조국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에 눈을 뜬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제주도의 상황은 일제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섬의 주인이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바뀐 것일 뿐, 법령도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이같은 현실은 혁파해야 할 타도 대상이었다. 젊은 김시종이 남조선노동당의 말단 당원이 된 것은 1947년 2월이다. 그해 말 그는 제주도 학무과의 촉탁 직원으로 취직한다. 김시종의 업무는 학교용 교재를 만들어 우체국을 통해 섬 전체에 배포하는 일이었다. 4·3이 시작되자, 폭력의 광풍 속에서 1948년 5월 동지가 총에 맞아 참살당한다. 제주4·3, 망명이 된 밀항 그는 당으로부터 “복수를 위해 (평소 출입하던 우체국) 우편물에 불을 질러라”는 임무를 받는다. 일을 저지른 김시종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숙부 집에 숨어든다. 남로당원 조카를 숨겨주던 숙부는 애꿎게도 배신자로 오해받고 남로당 무장대에 죽창으로 살해됐다. 이런 살기등등한 상황에서 김시종의 부모는 1949년 외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키기로 결심한다. 떠나는 김시종에게 부모는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우리 눈앞에서 죽지 마라.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일본에서 살아라.” 그가 부모의 묘를 찾아 성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별 후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98년이었다. 4·3이 끝난 뒤에도 제주도인의 밀항은 계속됐다. 단, 목적이 돈벌이로 변했다. 그와 함께 밀항자의 절대 수가 크게 줄었다. 4·3 직후인 1949년엔 밀입국을 했다 검거된 한국인이 8302명이었지만, 국교정상화 직후인 1966년 검거자는 767명에 그쳤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은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은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온 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로 접어드는 초입이었다. 농촌에 살던 젊은이들은 1960~70년대 서울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연재한 것은 1966년 2월이었고, 40년 전 이미 만원으로 꽉 찬 서울의 인구는 38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인들이 목표로 삼은 도시는 육지 사람들과 달리 서울이 아닌 오사카였다. 그곳에 자신들의 오랜 가족·친족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조경희 교수의 논문을 보면, 1960~70년대 밀항을 시도한 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만날 수 있다. 논문에 등장하는 78살 남자와 69살 남자는 “농사짓는 것 외에 제주도에서 돈 벌 길이 없었던 청장년층에게 밀항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 했다. “배는 작은 똑딱선에서 30명이 타는 무역선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부산 경찰도 브로커와 밀항 희망자들의 거래를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돈만 주면 경비정이나 경찰이 선착장까지 안내해주기도 했다.” 제주를 떠받친 자이니치들 재일동포의 애환을 그린 또 다른 일본 영화 <박치기>(2004)를 보면,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와 주인공 안성의 집에서 일하게 된 한국인 청년이 등장한다. 어리바리한 그에게 사람들은 “너도 부자가 되고 싶은 거지, 열심히 일해”라고 말한다. 밀항해서 일본에 뿌리내린 이들은 고생해 번 돈을 보따리장사를 통해 제주의 가족에게 전했고, 이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 발전의 탄탄한 밑거름이 됐다. 이것은 어찌 보면,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울 수 없는 한-일 교류사의 한 부분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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