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3>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이감 중인 사상관계 소년범들(1950년 7월1일). 강성현 제공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스틸 사진은 바로 사진병들이 찍은 전쟁사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군은 전술부대의 전투활동을 지원하는 전투사진, 군의 인사 증명, 공보용 뉴스 사진, 영화, 역사 기록, 심리전 프로젝트 등을 위해 미 육·해·공군 산하 부대에 사진조직을 만들어 확대했다. 민간의 직업사진가들을 소집하거나 비사진가를 훈련해 ‘사진병’으로 동원했다. 지난 연재에서 다룬 버마 미치나, 중국 쑹산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사진들은 중국·버마·인도 전쟁터에서 활동한 164통신대사진중대 사진병들이 찍었다. 앞으로 다룰 해방 뒤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사진들도 하지(J. R. Hodge) 중장의 제24군단 소속 123통신사진파견대, 주한미군정의 502통신사진파견대, 맥아더 총사령관의 71통신대 A중대 사진대,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사진병들이 찍은 것이다.
군의 사진활동으로 생산된 한국 관련 사진, 특히 전쟁사진은 아주 방대하다. 우선 양이 압도적으로 많다. NARA 사진실에만 10만 장 넘는 한국 관련 사진 자료가 있다. 무엇보다 이 전쟁사진 아카이브는 서울 중심성과 특정 주제 편향성에서 벗어나 있고, 사진 속 피사체가 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해 질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서울부터 제주도에 이르는(심지어 한국전쟁 ‘북진’ 시기 평양, 진남포, 함흥, 흥남, 원산 등) 한국의 주요 지역은 물론 아시아 지역들로 ‘트랜스-로컬’하게 넘나들며 찍은 사진들이다. 군의 전투, 작전, 군정, 일반 정치 상황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문제와 문화, 일상생활의 순간까지 포착했다.
순간 포착의 목적이 기록, 선전, 그 밖의 무엇이든 피사체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만이 빈약하고 듬성듬성 구성된 공식 역사의 빈틈을 풍부하게 메워가며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사진2·3>은 여전히 대한민국 공식사(史)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되지만 머잖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를 새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디선가 ‘처형’됐을 소년범들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묘한 긴장감을 주는 사람들이다. 경계하는 경찰과 한국군이 보이고, 앳된 소년들이 납작 엎드리듯 앉아 있다. 더위와 기다림에 지친 것일까? 두세 명만이 카메라를 의식할 뿐 대부분 걱정과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살피고 있다. 이곳은 어디이고, 이들은 누구일까? 1950년 7월1일 이 사진을 찍은 행콕 일병은 이들을 ‘북한군 포로’로 알고 포착했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이 사진 속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난 고성능 스캔을 시도했다. 프레임 후경의 건물은 분명 기차역이었는데 어딘지 특정할 수 없었고, 그러던 차에 왼쪽 건물의 세로 현판이 눈에 띄었다. 고성능 스캔 덕분에 ‘수원경찰서 역전경찰관파출소’라는 글자를 판독할 수 있었다. 장소는 수원역이었다. 이날 수원역 앞에 북한군 포로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이들은 인천소년형무소에서 후방의 다른 형무소(대전형무소)로 이감 중이던 이른바 사상관계 소년범들로 판단된다. 한국 정부에 의한 형무소 재소자 학살 관련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제주 4·3과 여순 사건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약식 군법회의를 거치거나 재판 절차도 없이 형무소로 끌려왔다. 죄목과 형기를 형무소에 와서 아는 경우가 횡행했다. 인천소년형무소에는 단기형을 받은 제주 4·3과 여순 사건 관계 소년범이 많았다. 문제는 1950년 ‘재소자인명부’ ‘재소자인원일원표’ ‘교정통계표’ 등 어떤 관련 자료에도 이들의 이감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거다. 이들은 개전 직후 이감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분명히 안다. 불법적으로 어디에선가 ‘처형’됐을 것이다. 설령 이들이 대전형무소로 무사히 옮겨졌더라도 대전 인근 산내 골령골의 ‘처형’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행콕 일병에 의해 시각화되고, 이후 검열을 피해 전쟁 중 나온 사진집에 실리게 된 것은 북한군 포로로 오인됐기 때문이다.
같은 피사체, 다른 인식
흥미롭게도 주한미군사고문단 사진장교 윈즐로(F. J. Winslow) 중위도 하루 전날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피사체에 시선을 빼앗겨 거의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윈즐로는 이들을 ‘북한군 포로’가 아닌 피란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남한 민간인’으로 인식했다. 적군 포로가 아닌 민간인으로 본 점에서 윈즐로가 더 정확했지만, 어째서 이들을 피란민으로 알았을까? 윈즐로의 사진 속 경찰들의 경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끌려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쟁 전부터 한국에서 사진활동을 했고, 한국인에게 인도주의적 시선을 담은 사진을 많이 남긴 그가 정말 착각했던 것일까? 착각보다는 검열이었을 것이다. 이 사진 뒷면에 찍힌 ‘배포 불가’(not released) 표시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닐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