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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소시효에 유죄를 선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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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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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도적 범죄자 처벌의 가장 큰 장벽…국제법의 원칙에도 위배돼

사진/ 민주노동당 인권위원장 이덕우(왼쪽에서 두 번째)변호사등 6개 인권사회단체 대표들은 1월30일 수지김 유족들과 함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이용호 기자)
전두환, 안기부·보안사, 이근안, 삼청교육대, 장세동….

이 이름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국가기관이 자행한 폭력의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성’과 인권유린의 성격을 말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들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피해자들은 공포와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어느날 이 이름들을 법과 정의의 목소리로 호출할 수 있게 됐다. 공포없이 수치심없이 불러세웠건만, 그러나 이름의 주인공들은 공소시효라는 안전판 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국가기관의 살인에 면죄부


사진/ 99년 10월 자수하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10여년을 숨어 있다가 공소시효가 완료됐을 때 자수했다.(이정용 기자)
“국가기관이 살인자와 공모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여인을 간첩으로 둔갑시켜놓고도 죄과를 씻지 않는다면 과연 국민들이 법과 정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기관 책임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멀쩡하다면 국민들이 과연 국가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1월23일 오전 서울지검 기자실에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진 목소리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지김의 셋째동생인 김옥림(41)씨.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인권운동사랑방 등 6개 인권사회단체가 “수지김 간첩조작사건 책임자를 처벌하고 반인도적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배제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한 바로 뒤이다.

김옥림씨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인권사회단체들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고발했고, 수지김의 유족들은 최근 장씨를 인터뷰한 <신동아> 이아무개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인권사회단체의 장씨 고발 이유는 “국가기관의 최고책임자가 살인을 은폐하고 간첩을 조작한 것은 명백한 반인도적 범죄로 국제법상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수지김 유족들의 이아무개 기자 명예훼손 고소는 “장씨 인터뷰에서 유족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책임자 처벌 운동을 벌이는 것처럼 묘사하는 등 기사 곳곳에서 장씨를 비호하면서 유족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것이다(<한겨레21> 394호 참조). 유족들은 이와는 별도로 장씨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률 없으면 범죄 없고, 법률 없으면 형벌 없다.” 법대 출신이라면 1학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죄형법정주의이다. 형사법의 최고 원칙인 죄형법정주의는, 어떤 행위가 범죄인지 또 그 범죄에 대해 어떤 형벌을 주는지 미리 법률로 규정해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대원칙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죄형법정주의가 때론 도그마가 돼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발목을 잡는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소시효를 이유로 반인도적 범죄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과거청산과 책임자 처벌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공소시효는 절차적 문제이므로 죄형법정주의 원칙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과 “반인도적 범죄라 해도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평행선처럼 맞서왔다.

국제조약 가입·특별법 제정 필요

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97년말 풀려나는 모습.(이정우 기자)
공소시효란 어떤 범죄사건에 대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이다.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관계를 존중해 사회와 개인생활의 안정을 꾀하고 형벌권을 적정하게 행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결과 증거가 인멸되거나 증인이 없어져 방어권 행사가 어려워진 피고인도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형량의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 무기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10년, 장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는 7년 등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공소시효는 언제나 두 얼굴로 존재해왔다.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 해도 7∼10년만 피해다니면 면죄부를 얻게 되거나 대량학살의 범죄자라 해도 15년만 지나면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원래 뜻인 선의의 얼굴에 반하는 공소시효의 어두운 얼굴이다. 그 결과 피해자도 있고 가해자도 있지만 처벌은 없는 기묘한 상황이 반복돼왔다. 이근안 고문 피해자나 과거 삼청교육대 피해자, 청송교도소 피해자들은 모두 공소시효의 벽에 부딪혀 민형사상 피해구제를 받지 못하고 책임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95년 5·18 특별법을 통해 시효를 중단시켜 처벌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과 2년 뒤 석방되고 이듬해인 98년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아 특별법 제정 의지마저 무색하게 했다.

99년 말 이근안이 자수한 배경에는 자신의 범죄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근안의 혐의에 김근태·함주명씨 등 상당수에 대한 고문가해 사실이 포함되지 않자 민변 소속 변호사들은 이씨를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문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소시효가 초과됐다는 이유로 불기소처분했고 변호사들이 서울고검 항고, 대검찰청 재항고까지 했으나 계속 같은 이유로 기각됐다. 그 결과 이씨는 납북어부 김성학씨를 불법감금하고 독직폭행(고문)한 혐의로만 구속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가해자가 잡히고 가해사실이 모두 인정됐지만 처벌과 단죄는 없는 일이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당시 이근안을 고발했던 박찬운 변호사는 “전쟁·학살은 물론 고문,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인한 박해 등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법률 선진국에서조차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게 보편화되고 있다”며 “수지김 살인은폐·간첩조작 사건의 진상이 일부 드러났지만 가해자들이 털끝 하나 처벌받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 인권후진국이자 법률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길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세계적인 흐름과 국제법·국제관습법의 원칙은 크게 네 가지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처벌이 가능하다(보편적 관할의 원칙) △범인이 발견되면 시간과 관계없이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시효부적용의 원칙) △지위에 따른 면책,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수사나 기소를 하지 않는 것, 정치적 편의에 따른 사면 등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불처벌 금지의 원칙) △성문의 사전조약 없이 국제재판에서 처벌 가능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처벌할 수 있다(죄형법정주의의 완화).

임시국회 특례법 통과를 기대한다

사진/ 노태우 전 태통령이 97년말 풀려나는 모습. 반인도적 범죄를 다루는 국제법에서는 정치적 편의에 따른 사면을 금지하도록 정하고 있으나 이들은 이듬해 사면됐다.(이정우 기자)
우리나라 헌법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6조1항).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반인도적 범죄수사와 처벌과정에서는 단 한번도 이것이 지켜진 적이 없다. 그 방패막이는 언제나 공소시효였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2월5일 주최하는 ‘공권력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의 처벌방안과 재발방지대책 마련’에서도 공소시효 문제는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인권사회단체가 주장하는 공소시효 배제 방법은 크게 두 갈래이다.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해 정상적인 공소제기가 불가능했던 사건에 대해서 정부와 국회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특별법을 만들거나 기존의 법을 고치고, 6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범죄에 관한 시효부적용 조약에 즉각 가입하고 별도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국제법의 원칙을 따르라는 것이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서울 노원갑)이 만든 가칭 ‘살인죄 등 반인륜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하 특례법)은 사안별로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광범위하게 일반법을 고치는 난처한 상황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특례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관계가 바뀌거나 자기 방어능력이 어려워진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공소시효이다. 그러나 공소시효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살인·고문치사·사체유기 등 반인륜적 범죄나 정치공작적 의도로 진실을 은폐·조작한 범죄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특별 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범죄에 대한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상태가 이어지다가 조작·은폐의 진상이 드러난 경우 사실상 수사가 불가능했던 기간 동안 그 범죄와 관련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정지되도록 한다”는 원칙으로 공소시효의 정지와 재정신청에 관한 특례를 정한 것이다.

오는 2월 임시국회 제출을 앞두고 있는 이 특례법의 내용에 대해 공소시효의 벽에 부딪혀 두번 세번 울어야 했던 반인도적 범죄의 피해자들과 인권사회단체들은 크게 환영하고 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었고 수사도 이뤄지지 않았던 사실상 얼어붙어 멈춘 시간이었다”며 “시간을 멈추게 한 장본인의 범죄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그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던 시기까지 포함해 공소시효를 보장해주는 것은 그야말로 법정신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빼앗긴 시간을 되찾는 방법은 공소시효를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의지를 갖고 공소시효를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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