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은 지난 8~9월 한민족의 상고사를 실제보다 과장해 소개하는 유사역사의 주장에 대한 젊은 사학자들의 비판을 소개하는 ‘진짜고대사’ 를 기획했다. 제1187호에선 유사역사가들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았던 김현구 고려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인터뷰도 실었다. 그러나 이는 유사역사만의 잘못일까. 지난 8월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학고재)를 펴낸 신형준 전 <조선일보> 문화재 기자가 유사역사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기존 사학계가 적잖은 토양을 제공했음을 지적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를 두 차례 나눠 싣는다. _편집자
루트2(√2)의 비례미를 구현했다고 한국 사학계가 자랑하는 석굴암.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에 따르면, 석굴암에는 루트2의 비례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 자료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권자인가 ②를 살피자. 일본 건축기사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1940년 발표) 이후, 석굴암이 루트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다는 학설은 우리 학계에서 확대재생산됐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이 발간한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를 보면, 석굴암에서 루트2는커녕 어떤 수학적 비례미도 찾기 힘들었다. ‘석굴암 루트2 비례미론’의 핵심은 부처님을 모신 석굴암 ‘주실’의 반경이 12당척이며, 이를 기준으로 루트2의 비례미가 석굴암에 구현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에 따르면 석굴암 주실의 반경은 곳에 따라 9.8~13.15척이었다. 루트2의 비례미를 석굴암에 정교하게 구현했다는 신라인들이 고작 3.6m 정도의 석굴암 주실 반경을 만들 때 어떻게 3.3척(약 1m) 이상의 오차를 냈을까? 석굴암의 모든 실측치를 종합해도 루트2의 비례미는 전혀 찾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③. 동북아시아 논란에서처럼, 이 주장 역시 ‘근대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있어야 한다. 역사학에서 근대란 ‘현대와 가까운 시대’를 이르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근대’란 종교와 비과학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난 시대다. 그래서 ‘마술이나 주문 등에서 깨어남’을 뜻하는 ‘disenchantment’(디센챈트먼트)나, ‘빛으로 밝게 하는 것과 같은 깨우침’을 내포한 ‘enlightenment’(인라이튼먼트)가 서구 근대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서구인들은 이런 각성을 바탕으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거나, 피가 심장을 중심으로 혈관을 정교하게 순환한다는 사실, 지구 등 행성의 운동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점, 전기와 자기의 성질 등 ‘휘황한 근대적 사고들’을 연이어 밝혀냈다. 동양 사회는 모두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사고 체계다. 이런 근대과학의 발달과 함께한 것이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대량생산은 증기기관 등 과학과 공학의 발달로 이뤄진 산물 없이는 불가능한 생산양식이었다. 만약 자본주의를 ‘상업의 발달과 화폐유통의 확산’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지중해를 호수로 삼아 국제적 교역을 펼쳤기에 영국에서까지 동전이 득시글하게 나오는 고대 로마제국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서구 학자는 없다. 근대와는 거리가 먼 조선 후기 외세가 본격적으로 침범한 19세기 후반 이전의 조선으로 눈을 돌려보자. 당시 조선에서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과학과 공학이 ‘자생적으로’ 꽃피고, 이를 바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경제구조가 ‘자생적으로’ 싹텄는가? 조선 후기가 정체(머무름)됐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유통이 확산됐다는 걸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적 과학과 공학, 이에 바탕한 자본주의나 그 싹이 ‘자생했느냐’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도 칭송하는 실학자나, 성군으로 받드는 영·정조가 ‘우리의 성리학적 사고체계를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 과학적 사고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단 한 차례라도 있었나? 조선 후기에 그나마 앞서간 사람을 들라면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상하기보다는 청나라를 본받자”고 외친 실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청은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중영전쟁(아편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근대와는 거리가 먼 국가였다. 그런 나라를 본받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근대의 전령이 될 수 있을까? 반면 일본은 청이 아니라 ‘서구’를 본받자고 했다. 그 차이가, 두 나라가 보인 근대화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역사에 한국사학계가 그간 보인 미화와 과장의 한 단면일 뿐이다. 물론 이 분위기가 왜 팽배해졌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망해버린 조국, 아버지(나라)가 없다는 ‘고아 의식’에 더해진 ‘현해탄 콤플렉스’(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표현) 혹은 ‘근대성 콤플렉스’, 그로 인해 생긴 “엽전은 안 돼”식의 자기비하. 광복은 이를 한순간에 ‘극복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근대화에 뒤처져 외세의 강점을 당했다는 자괴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살피려는 시도는 분명 시대적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냉소가 판칠 때 묵묵히 우리 역사 연구의 밭을 갈아놓은 선배 한국사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도 마땅하다. 하지만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근대성 콤플렉스’의 반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기에 바쁘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근대성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사학계는 ‘×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식의 침묵을 깨고 ‘유사역사학’에 정면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냉정하게 곱씹어볼 것이 있다. 유사역사학은 어떤 토양에서 자랐는가 하는 점이다. 유사역사학의 성장에서 이른바 ‘강단 혹은 주류 한국사학계’(이하 한국사학계)의 잘못은 없을까? 유사역사학이란 괴물의 성장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성주사 낭혜화상 탑비’. 최치원은 이 글에서 ‘신라가 당나라 덕분에 미개한 나라에서 문명국이 됐다’는 식으로 적었다(왼쪽). 최치원에게서도 보이듯, 중국 사대는 안타깝지만 한국사를 관통한다. ‘백제왕’이라는 칭호 앞에 중국의 반쪽짜리 왕조에서 보낸 관작을 ‘자랑스레’ 먼저 적은 무령왕릉 묘지석. 지금 생각하면 수치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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