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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얼어죽을 연구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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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30 00:00 수정 : 2010-03-3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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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의 독단과 전횡 속 자율성 무시되는 민간출연기관 연구자들의 서러움과 분노

정초인 지난 1월2일 연구원 3명은 느닷없이 지방출장 명령을 받았다. 출장 목적은 ‘지방자치단체별 인프라 현황과 추가 소요량 추정’이라는 연구과제 수행. 다음날 당장 떠나라고 했다. ‘별도의 허락이 없는 한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는 지시사항이 이례적으로 뒤따랐다. 애초 경남·부산권으로 돼 있던 조사지역도 갑자기 전국으로 바뀌어 2명이 추가 투입됐다. 각자 맡아온 기존 연구과제는 이 날짜로 즉각 중단됐고, 동시에 다른 연구자로 교체됐다. 해오던 과제물을 빼앗기고 ‘지방자치단체별 인프라…’라는 엉뚱한 연구에 투입된 5명은 모두 공교롭게도(?) 노동조합(전국연구전문노조 한국건설산업연구원지부) 결성을 주도한 연구자들이었다. 이들 중 지방출장을 거부한 심규범 박사(노조 부지부장) 등 3명은 곧바로 파면됐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원장 이건영)에서 최근 벌어진 일이다.

‘업계 담합’비판하자 연구과제 박탈

1월22일 낮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 11층 건설산업연구원 원장실 앞. 지방출장 등 연구원 운영을 둘러싼 대립으로 노조 간부들과 이건영 원장 사이에 맞고함이 오가는 험한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다. “원장, 왜 자리를 떠나는 겁니까. 앉으세요!” “이 자리가 단체교섭인지 아닌지부터 당신(노조간부)들이 확실히 밝혀주세요.” 금방이라도 멱살잡이가 벌어질 형국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거슬러올라가면, 사태는 연봉재계약 과정에서 불거졌다. 지난해 말 다른 연구원들에 비해 낮은 연봉을 제시받은 심씨가 “연봉 책정의 근거를 알려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원장은 그러나 심씨의 요구를 무시하고 “12월27일까지 연봉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계속 근무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대응했다. 심씨를 비롯한 연구자 5명은 이에 맞서 12월28일 노조를 꾸렸다. 원장의 독단적 운영을 견제하려면 노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노조는 “조합을 무력화할 생각에서 원장이 노조 간부 5명을 몽땅 같은 과제에 집어넣어 지방출장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연구원쪽은 이를 부인한다. 김준한 경영관리부장은 “출장명령을 내린 지자체 인프라 조사는 연구원의 간판과제”라며 “오히려 이런 대형 과제에 참여해 훌륭한 성과를 내면 자신의 근무평점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급한 과제”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시급한 과제를 왜 굳이 원장과 갈등을 빚고 있는 연구자들, 그것도 전공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맡겼냐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건설산업연구원은 대한건설협회와 건설공제조합 등이 돈을 대는 민간출연연구기관이다. 이사진은 건설업체 사장들이다. 이번 건설산업연구원 사태는 연봉 계약과 노조 결성을 둘러싼 갈등으로 촉발됐지만 근본적으로는 연구자들의 자율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민간 연구기관의 잘못된 운영 행태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노조는 연구과제나 연구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연구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원장과 경영관리부장이 일방적으로 이를 이끌어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몇년 전 건설업계의 담합에 대해 비판적인 보고서를 쓴 연구자가 연구과제를 박탈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일과 관련해 김준한 경영관리부장은 “연구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서에 다 담을 수는 없다”며 “그래서 원장이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를 외치려면 그럴 환경이 되는 곳으로 가라”는 말도 보탰다.

전횡 제어장치가 전혀 없다

사진/ 전국연구전문노조.(김종수 기자)
그러나 심씨는 ‘건설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이란 연구원의 설립 목적을 환기시킨다. “담합이 건설업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외부 주문자(연구원에 출연하는 건설업계)에게 설득하는 것이 원장의 진정한 역할”이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준한 경영관리부장은 “외부에서 요청한 과제는 주문하는 사항을 중심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연구자의 자율성은 주문자의 요청 범위 안에서만 보장된다”는 논리를 폈다.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물론 용역 의뢰자의 요구와 연구 결과의 차이를 둘러싼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자의 학문적 양심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있는 논란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특히 재단법인 형태의 연구기관이라면 출연자라 할지라도 자기 소유물처럼 연구의 방향을 좌우할 수 없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인식이다.건설산업연구원 관계자들은 원장 등 몇 사람의 전횡이 제어장치가 전혀 없는 민간 연구기관의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전국연구전문노조 박용석 위원장도 “재단법인 성격의 대부분 민간 연구기관에서 원장의 독단과 전횡이 판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총리실에서 지도·관리하고 있으며, 민간 연구기관과 달리 철저한 외부감사를 받는다. 운영의 투명성을 위해 민간이사 6명을 포함, 총 12명으로 구성되는 독립적인 연구회로부터 감사를 받는 것이다. 물론 감사원의 감사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민간 연구기관은 돈을 대는 협회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실정이다. 원장의 연구원 운영에 대한 이사진의 감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연구기관은 건설업체의 눈치를 보고, 건설업체는 원장의 비민주적이고 독단적 운영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시끄러우면 폐쇄시켜버릴 수도”

사진/ 전국연구전문노조 박용석 위원장은 "대부분의 민간 연구기관에서 원장의 독단과 전횡이 판치고 있다."고 주장한다.(김종수 기자)
민간 연구기관인 주택산업연구원(원장 이동성)도 연구원의 운영을 둘러싸고 최근 내홍을 겪고 있다. 주택산업연구원의 주요 출연기관은 대한주택보증(주), 한국주택협회 등이다. 여의도 국회 앞에 있는 주택산업연구원은 벽마다 원장의 독단적 운영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어 있고 연구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피켓이 벽 아래에 즐비하다.

지난해 12월 노조(전국연구전문노조 주택산업연구원지부)를 설립한 안찬진 지부장은 “한때 37명이었던 연구원 인력이 지금은 20여명으로 줄었다”며 “구조조정으로 나간 한두명을 빼고는 연구원의 자의적 운영을 보다못해 뛰쳐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원장이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연구 방향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몇달씩 연구과제에 자신의 정신을 쏟아넣은 연구자의 의견은 묵살되기 일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주택산업연구원쪽도 건설산업연구원과 마찬가지 입장이다. “용역을 준 사람의 의도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연구원의 이런 태도는 연구원 조직의 전반적인 침체로 이어진다. 노조 관계자는 “외부에서조차 ‘연구심의회가 원장 혼자 말하고 연구자는 아무 말도 못하는 원장 독무대’라고 꼬집을 정도”라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노조는 현재 원장의 독단에 제동을 걸기 위해 연구심의회 및 연구과제선정위원회 위원장을 기획조정실장으로 바꾸는 안을 추진중이다. 안찬진 지부장은 “대다수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보면 원장이 연구심의회를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않는다”며 “연구자들의 토론활성화를 위해서도 연구심의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동성 원장은 “노조가 시끄러우면 연구원을 폐쇄시켜버릴 수도 있다는 게 출연기관 이사회의 뜻”이라는 말을 연신 흘리며 연구원들을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연구의 자율성에 그치지 않는다. 주택산업연구원은 원장의 친인척 채용문제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주택산업연구원 노조는 지난해 말 원장과 행정실장이 각각 조카를 연구원에 채용한 경위 및 몇 가지 원장의 비리 의혹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다. 거듭된 요구에 이사진은 특별감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출연기관인 대한주택보증이 벌였던 감사 결과는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동성 원장도 당시 감사 결과에 대해 “그 부분은 특별히 할 얘기가 없다”며 질문의 허리를 잘랐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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