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9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피의자 방어권 보장과 자기변호노트’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제공
“이때 피의자 먼 산을 보며” 국선변호사 등으로 일하며 1천 명 넘는 형사사건 피의자를 변호해온 법무법인 위민의 조수진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의 방어권 침해 사례를 발표했다. 조 변호사는 자신과 피의자가 경험한 부당한 수사 사례로 호통치기, 모욕적 언사, 물건 던지기 등을 들었다. 또 여러 명의 수사관이 한 명의 피의자를 두고 “당신 진술이 말이 되냐” “누가 믿어줄 것 같냐?”라며 몰아가거나, “괘씸죄에 걸릴 수 있다” “본인에게 유리한 게 뭔지 잘 생각해보라”며 허위 자백을 유도하는 사례도 직접 보거나 들었다. 조 변호사는 “조서에 피의자의 행동에 대한 묘사를 연극대본 지문처럼 넣어서 재판부가 의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사례도 많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피의자가 조사 중에 별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조서에 ‘(이때 피의자 어금니를 꽉 물며) 아닙니다.’ ‘(이때 피의자 먼 산을 보며) 아니라니까요.’ ‘(이때 피의자 긴 한숨을 쉬며 말이 없다)’ 등 필요 없는 내용을 적어넣는 것이다. 일반 형사사건에서 조서의 힘은 상당히 크다. 법원은 재판에 제출되는 증거와 법정 진술을 중심으로 판결을 내린다는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판사와 법정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재판으로 피고인이 무죄를 다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조서를 중심으로 재판이 이뤄지곤 한다. 특히 검찰 피의자 신문 조서는 별다른 절차적·형식적 문제가 없다면 피의자가 법정에서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조 변호사는 이같은 한국 증거법의 특성 때문에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불러 진술 방향을 유도하고 조서를 꾸미는 일에 힘을 집중하게 된다”며 “피의자 방어권을 보장하려면 장기적으로 조서 제도를 폐지 내지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법 개정이 필요한 일이다. 반면 자기변호노트는 당장 시행이 가능하다. 조 변호사는 “조서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기변호노트가 도입돼야 한다. 피의자가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사기관이 이를 의식해 강압 수사를 하지 못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자기변호노트는 시민이 수사기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끈’이다.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변호노트 보완 필요성도 이날 토론회에서 공개된 ‘자기변호노트’ 초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정영훈 서울변회 인권이사는 자기변호노트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더 간단명료하게 작성되면 좋겠고, 장애인·외국인 등이 활용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피의자가 메모할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부서 등을 검찰과 경찰 조직 내에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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