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8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임성준(14·왼쪽)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은 이날 “특별구제계정에 일정 부분 정부 예산을 출연해 피해구제 재원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특별구제계정은 지난 8월9일 시행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서 정한 재정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중 가해기업 도산 등으로 배상받을 수 없거나, 피해를 공식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가습기살균제와 피해 관련성 등을 고려해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피해자 등에게 구제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돈이다. 재정은 2천억원 이내를 한도로, 가습기살균제 사업자(1천억원)와 원료물질 사업자(250억원)가 총 1250억원을 분담토록 했다. 문 대통령은 이 계정에서 정한 기업 분담금 외에 정부 예산을 추가 투입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정부의 예산 지원 약속에 대해 ‘의미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애초 법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법 자체에 국가의 책임이 반영되지 않았고 제조판매사들의 책임을 1250억원이란 돈으로 국한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지급한 구제급여에 대해 가해기업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고 정해, 법적 책임을 모두 기업들에 귀속한 점도 지적한다. 이들은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확실한 원인 규명과 의학적 조사·판정을 제대로 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도 했다. 이틀 뒤인 8월10일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어, 2015~2016년 피해 신청한 1214명을 심사한 결과 94명의 피해를 인정하기로 추가 결정했다. 그 밖에 재심사를 통해 기존 3단계(가능성 낮음) 판정자 3명도 2단계(가능성 높음)로 재판정해 피해를 인정했다. 가습기살균제로 태아가 피해를 입은 경우(17명)에도 처음으로 피해를 인정했다. 환경부는 8월8일 현재까지 전체 피해 신청자 5780명 가운데 2196명의 판정을 완료했고, 그 가운데 총 388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판정받은 신청자 10명 중 한두 명꼴로 피해를 인정받은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피해 인정 기준이 여전히 협소하다고 지적한다. 서흥원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과장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천식에 대해선 인정 기준 마련 과정에 있고 다른 질환들은 피해 인정 여부를 조사·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 규모 자체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쪽은 “한국환경보건학회가 정부 용역을 받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인구는 350만~400만 명, 사용 후에 건강 문제가 발생해 병원 치료를 받은 인구는 30만~40만 명”이라며 “정부가 이들의 피해 실태 파악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로 피해를 입힌 혐의(업무상과실치사상)로 기소돼 법원(항소심)에서 최대 징역 6년을 선고받은 옥시레킷벤키저와 세퓨 관계자들 이외의 제조판매사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집계에 따르면 1994년 첫 가습기살균제 출시 이후 39개 이상의 가습기살균제가 시중에 판매됐고, 판매량 정보가 확인된 18개 제품의 판매량은 총 829만 개에 달한다. 문 대통령은 “재발방지 대책 추진에도 만전을 기하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환경부는 모든 살생물 물질과 제품에 대해 안전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유통을 허용하는 ‘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과 제조·수입량과 무관하게 모든 기존 화학물질을 등록하도록 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했다. 두 법안은 문 대통령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만남 당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과거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 주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등이 유해성 심사를 비껴간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한 대책이다. 잠 못 이룬 피해자들의 생각 문 대통령과 만난 날, 피해자 가족 권씨와 최씨는 새벽 3~5시에 잠이 들었다. 권씨는 “‘한 사람 바뀌었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오늘 받은 사과와 약속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지’라는 생각에 잠을 잘 못 이뤘다”고 말했다. 최씨는 “대통령의 사과에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앞으로 남은 일들에 대해 아직 맘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통령이 직접 끝까지 챙겨나가겠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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