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해 공직선거법 위반 파기환송심 공판을 위해 서울고등법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정권이 바뀌고 ‘꼼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원 전 원장 파기환송심 선고 직전인 7월24일, 원 전 원장의 기존 해명을 무색하게 하는 부서장 회의 녹음파일이 공개됐다. 녹음파일은 ‘국정원 적폐 청산 태스크포스(TF)’가 복구해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 전 원장의 정치공작 지시의 주제와 주요 맥락은 <한겨레>가 2013년 3월 보도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대로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2년 4월20일 녹음파일이다. “현재도 하고 있지만 보다 강화해야 된다. 사실상 우리 (국정)원(본부)에서도 하지만 지부에서도 심리전, 12국하고 다 연결돼서 하고 있지요? 심리전이라는 게 대북 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도 꽤 중요해요.” 12국은 심리전단이 확대된 심리정보국을 일컫는다. 이 녹음파일 하나로도 원 전 원장이 심리전단의 활동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대국민 심리전을 직접 독려한 사실이 드러났다. 더 주목할 내용은 지부 활동이다. 녹음파일 공개로 정치공작이 온라인뿐 아니라 지부 등 오프라인에서도 진행된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난 셈이다. 국정원의 오프라인 공작 의혹은 <한겨레>가 2013년 5월 ‘박원순 제압 문건’ ‘반값 등록금 차단 문건’을 잇따라 단독 보도하면서 불붙었다. 국정원이 2010년 10월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을 공격하기 위해 여당·정부기관·민간단체·학계를 총동원하는 계획 문서와, 반값 등록금 요구를 묵살하기 위해 어떻게 여론전을 펴야 할지 구체적인 방안 등을 담은 공작 문건이었다. 문제는 문건 공개에도 국정원의 오프라인 공작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에 의욕을 보이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석연찮은 혼외자 의혹으로 대검청사를 떠난 뒤인 2013년 10월, 검찰은 두 문건이 국정원 양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관련 고발 사건을 각하했다. 2013년 꾸려진 검찰 특별수사팀 역시 수사 과정에서 보수단체 자금 지원 등 국정원 국내 정치 파트의 여러 불법 사실을 확인했지만, 심리전단의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하지 못했다. 심리전단만을 수사하는 데도 온갖 외압이 뒤따라 버거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녹음파일 내용이 공개되면서 국정원의 오프라인 정치공작을 전면적으로 수사해야 할 근거가 차고 넘치게 됐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선거 개입이다.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보면 국정원이 여당 후보 단일화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각종 선거에 개입한 흔적이 드러난다. “우리 지부에서 우리 지방자치단체장이라든가 의원들, 앞으로 후보 있잖아요. 지금부터 잘 검증해서 그냥 본인들 안 나가려고 하면 ‘당신 나가라’ 해가지고 (내 보내세요).”(2009년 6월) “인물도 여러 가지 제대로 된 인물이 발굴될 수 있도록 그런 노력도 할 필요가 있어요. 교육감 선거도 분열 때문에 졌잖아요. 지금부터 대비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신경 씁시다. 지금 현 정부 대 비정부 싸움이거든요.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12월부터는 예비등록 시작하죠? 그러니까 특히 지부장들은 현장에서 교통정리가 잘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챙겨줘요. 우리는 (우리가) 했다고 (언론 등에) 확인 안 하면, 확인 안 되도록 하는, 꼬리 안 잡히도록 하는 정보기관이에요.”(2011년 11월) 이 밖에도 원 전 원장의 녹음파일에는 노동조합 선거, 보수단체 관리, 언론 통제 공작이 수시로 이뤄진 정황도 담겨 있다. 반드시 가야 할 길 ‘국정원 적폐 청산’ 원 전 원장의 불법적 지시는 2013년 3월 <한겨레>의 최초 보도 이후 4년4개월이 지나서야 녹음파일 형태로 실체를 드러냈다. 그만큼 정보기관이 벌인 은밀한 공작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어렵다. 이 때문에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만이라도 확실히 수사해 매듭을 지어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이 국정원 적폐 청산을 이끌어낼 수 있다. 힘들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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