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구체적인 솔루션은 쉽게 논의되지 않는다. 토론이 이뤄져도 대개는 증상을 완화하는 ‘진통제’를 논의하는 수준에 머물 뿐이다. 이따금 이뤄지는 논의도 대체로 ‘적응하며 생존하라’는 자기계발적 주술과 ‘그놈 잡아들여 한방에 해결하자’는 개혁 신화를 오가며 공전할 뿐이다. 이런 거대 담론은 유혹적이고 시원하나,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 문제가 풀리는 방식은 화려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을 조금 불편하게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사회 변화는 소수의 큰 기득권을 밀어냄으로써 시작되지만, 다수의 작은 양보를 통해 완성되기 마련이다. 경제평론가인 이원재 재단법인 여시재 기획이사가 불편하지만 고려할 만한 통찰력 있는 솔루션을 3주에 한 번씩 제시한다. _편집자
한 대도시의 마트 주차장에 차가 빼곡하다. 값싼 주차장은 자동차 증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연합뉴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우주인들은 검은 우주만 보며 지내지 않는다. 애플 직원들은 대형 유리창을 통해 보기 좋게 조성된 7천 그루 나무로 이뤄진 숲을 감상하며 쾌적하게 일할 수 있다. 애플파크는 직원들을 위해 무려 31만8천m²에 이르는 쾌적한 사무실과 실험실 공간을 제공한다. 그런데 애플파크에서 사무실과 실험실보다 더 넓은 공간이 있다. 주차장이다. 애플파크의 주차 공간은 32만5천m²다. 사람보다 자동차를 위한 공간이 더 넓다. 직원 1만3천여 명을 수용하는 공간에 자동차 1만1천여 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이 들어선다. 이렇게 넓은 주차 공간이 생긴 것은 애플이 원해서가 아니다. 애플파크가 위치한 쿠퍼티노시의 규제 때문이다. 쿠퍼티노는 모든 건물에 주차 공간 설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쿠퍼티노시 규정에 따르면, 부동산 개발업자는 한 구역을 개발할 때마다 집 한 칸당 주차 공간 2개를 둬야 한다. 그중 하나는 지붕이 있어야 한다. 패스트푸드 음식점에는 세 자리당 1대의 주차 공간이 있어야 한다. 볼링장에는 레인당 7개, 일하는 사람 한 명당 1개의 주차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낯선 규제인가? 한국에도 비슷한 규제가 있다. 서울은 아파트 등 다가구주택은 면적에 따라 65~75m²당 1대의 주차장을 마련해야 한다. 골프장엔 1홀당 10대, 골프연습장엔 1타석당 1대, 병원과 종교시설에는 150m²당 1대의 주차 공간을 지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시설마다 주차장 의무 설치 규정이 마련돼 있다. 주차장이 많으니, 자동차는 더 늘어난다. 사실 주차장 의무 설치 규정은 자동차가 지금처럼 대중화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자동차 제조 기업들로서는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 출발은 자동차의 원조, 미국이었다. ‘주차 전쟁’ 해법은 주차장 줄이기 1923년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는 아파트 건설 때 거기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차장을 짓도록 의무화했다. 최저임금처럼 ‘최저주차장’ 개념이었다. 이것은 미국 전체로 빠르게 확산됐다. 미국에서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포드자동차가 콜럼버스에 공장을 연 지 9년 만에 생긴 제도였다. 포드의 ‘모델T’가 1908년 시장에 나온 뒤 날개를 달던 때였고, 1920년 링컨을 인수한 뒤 고급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미국에서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시작된 ‘최저주차장’ 개념은 전세계로 확산된다. 싱가포르의 납골당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와이너리에도 주차장 의무 설치 규정이 적용된다. 자동차 대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중국 베이징조차 2003년 이 개념을 도입한다. 도시 중심부는 아파트 한 채당 0.3대, 외곽에는 0.5대로 정해졌다. 맞다. 자동차에는 주차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주차장이 필요하다. 자동차의 가동률은 점점 떨어져서 95%는 주차돼 있다. 도시는 주차장을 마련하느라 애쓴다. 공용 건물에는 ‘최저주차장’ 제도를 통해 값싸거나 공짜인 주차장을 최대한 확보해준다. 도로 위에는 ‘거주자우선주차’ 제도를 통해 주차장이 없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값싼 주차장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공짜 주차장을 최대한 늘리면 주민들 삶의 질이 값싸게 높아지는 것일까? 아니다. 공짜 주차장이라 해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그 비용을 낸다.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를 주차하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셈이다. 그것도 하루에 1시간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사는 데 말이다. 게다가 사람이 걷는 도로를 줄여 주차 공간에 내주는 것이다. 주차장에 투입하는 재원은 자동차 구매를 유도하는 지원금이다. 대중교통 이용자의 편리를 덜어내어 자동차 운전자에게 옮겨주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의 공동주택에 설치하는 지하주차장은 1대당 최소 3500만원 정도 건설비가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용은 모두 주민들이 나눠 낸다. 주차장은 도시 공간 이용 효율성과 미관도 떨어뜨린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든 것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이에 비해 자동차 자체의 이동 효율성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선진국에선 자동차 1대당 평균 탑승객 수가 1명을 조금 넘는다. 대부분 ‘나 홀로’ 운전 차량이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미세먼지와 탄소 배출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주차장 정책을 바꾸는 도시들이 나온다. 영국 런던시는 2004년 ‘최저주차장’ 규정을 없앴다. 그 뒤 새롭게 개발되는 주거지에선 제공 주차 면적이 줄었다. 일본은 ‘차고지증명제’를 운영한다. 자동차 구입자가 차량 주차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증빙을 가져가야만 자동차를 등록할 수 있는 제도다. 도시가 주차장을 마련해주지 않으니, 운전자 스스로 주차장을 확보하라는 뜻이다. 운전으로 먹고사는 사람만 피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교통포럼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을 모델로 카셰어링(차량공유)과 지하철 등을 시뮬레이션해보니 필요한 주차장은 5%에 불과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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