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우리집’을 찾은 고 이순덕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김복동 할머니가 울고 있다(위). 이순덕 할머니의 딸과 손녀(아래). 박승화 기자
그 뒤 나는 어디든 다녔다. 수요시위, 인권캠프에 가서 “인정하라, 사죄하라, 보상하라”고 외쳤다. 그 사이 나의 판결은 뒤집혔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나의 승소를 최종 ‘기각’했다. 그리고 총리가 된 아베 신조는 지금까지 “조사 결과 발견된 자료 가운데선 군과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것과 같은 기술이 발견되지 않았다”(2007년 3월)고 말했다. 내 나이 아흔 살에 도로 그 자리가 됐다. 포기했느냐고, 아니 나는 지지 않는 ‘동백꽃 할매’다. 그해 7월 말 미 하원이 일본 총리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다. 우리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덕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이 내게도 “축하한다” 인사를 건넸다. 그날도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는 활짝 웃었다. “순덕 할매, 안 아픈 세상 갔어요” 그래도 2015년 12월28일에는 참 슬펐다. 왜 이 나라가 자국민에 대한 피해 구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하는지 화가 났다. 김복동(91) 할매는 “열심히 싸워서, 아베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아파서 요양소에 갔다. 그 전까지는 김복동, 길원옥(89) 할매와 함께 살았다. 위안부 할머니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손영미 소장과 우리 셋이 마지막까지 살았다. 처음엔 여럿이 함께였는데, 황순희, 손판임, 김요지, 박우득, 이옥금 할매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나까지 떠나왔으니 살아 있는 위안부 할매는 38명뿐이다. 입관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들렀을 때, 길원옥 할매는 이제 막 깨어나 정신이 없었는지 내 사진을 보고 “언제 왔느냐”며 “왜 새벽부터 돌아댕기냐”고 물었다. 사진 속 나는 반가웠는데, 사람들이 꺼이꺼이 울더라. 김복동 할매는 “저승에 가거든 할매들 만나 잘 살고 계쇼. 아베가 협조 잘하게 좀 도와주고. 이 김복동이가 살았을 동안에 열심히 열심히 싸워서 항복을 받고 곧 따라갈게요. 잘 살길 바라요. 잘 가요” 인사를 했다. 우리 셋은 언제나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옆에는 늘 그렇듯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앉아 복동 할매를 나무랐다. “할매, 가긴 어딜 따라가요. 순덕 할매는 안 아픈 세상으로 간 건데요.” “그래, 좋다. 안 아픈 세상으로 가니 좋다. 내 뒤따라갈게. 싸워서 아베한테 항복받고. 거기 다 모여 있으라. 그냥 있지 말고. 여튼 고상(생) 많이 했다.” 내 살아 소원이 “내가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밥 배부르게 먹고 가는 것”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학생 40여 명이 따랐다. 수요집회를 취재한 뒤 손자처럼 살가웠던 ‘미디어몽구’(http://mongu.net)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내 마지막 가는 길을 올려준 덕이 컸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날 보겠다고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4호실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니 뭉클했다. 나 가는 길 마지막으로 불러줬던 노랫말처럼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나 이제 간다. “살아 50년은 참혹했지만, 50년은 너무 행복했다.” *이순덕 할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참고 문헌
<이순덕 약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 이국언 지음, 시민의소리 펴냄, 2007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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