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안영춘] 그들은 안다, 진짜 양아치를

393
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크게 작게

방송 카메라와 함께한 노숙인 생활지도… 거리와 쉼터, 쪽방에서 만난 사람들

거리의 노숙인들은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지하철 역사 통로에서 맨바닥에 앉아 취중 노숙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다.

극적인 장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2박3일이 다 지나도록. 그리고 이른 새벽 터덜터덜 신문사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매우 단순했고, 그래서 더욱 선명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이다. 다만 하늘을 가릴 집이 없을 뿐. 한평이면 족할 아주 작은 지붕이.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내 체험이 한사코 극적일 수 없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극적이었다면 오히려 잘못된 것이리라.

지난해 말, 문화방송 <생방송 화제집중>팀에서 전화가 왔다. ‘기자가 뛰어든 세상’을 취재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정영무 편집장은 “홍보도 되고 좋겠다”며 선뜻 수락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지지부진했다. 방송용에 걸맞은 아이템을 찾는 일이 종이매체 기자들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바쁜 연말이라 그 일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편집장은 주저함이 없는 김소희 기자에게 아이템과 담당기자 선정 권한을 일임했다.


화면발 된다는 ‘이유’만으로 낙점

담당기자 선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 선배. 화면발 되는 사람이 안 선배밖에 없겠는데요.” 나는 물론 알았다.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아니, 내가 적임인 건 화면발이 아니라 내 귀가 얇아서라는 걸.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알이 튕겨졌다. “너, 텔레비전에 나왔더라.” 신문에 1면 머릿기사를 써도 전화 한통 없던 친구들이 TV에 스쳐지나가는 기자회견 장면에서 날 발견하고 전화질을 해오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내가 하는 수밖에.” 아, 중생아!

내 체험은 처음 사치스런 저울질로 시작됐다. 추위, 그리고 한뎃잠…. 노숙인이 떠올랐다. 그러나 노숙인은 내가 선택할 체험이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최근 노숙인 쉼터 실무자들이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노실사·www.freechal.com/homelessworker)이라는 운동단체를 설립했다는 걸 알았다. 복지와 인권까지! 순간 흥얼거림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실사 박용범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자가 뛰어든 세상’을 아느냐. 그는 “안다”고 했다. “노숙인 생활지도사 일을 체험해보고 싶다. 도와줄 수 있느냐?”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방송도 함께 간다.” 잠시 수화기 건너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일단 한번 와봐라.” 나는 안도했다. 나는 그때 내 안도감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체험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훈장을 달고 싶었던 것 같다.

1월8일부터 2박3일 동안 현장체험을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체험 일정표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그들은 나를 단단히 길들일 모양이었다. 첫날 낮시간 서울 신길동 ‘햇살 보금자리’ 주간쉼터 업무 체험 뒤 밤시간 ‘충정로 쉼터’ 야간쉼터 업무, 둘쨋날 오전 ‘자유의 집’ 입소상담과 의료행정 지원 뒤 오후 노실사 정기 사무국회의 참석, 그리고 늦은 밤 서울역 거리상담 뒤 영등포 쪽방 체험, 셋쨋날 사당동 ‘가족 쉼터’ 업무 체험 뒤 평가회. 어디 한곳 쉼표가 찍혀 있지 않았다. 읽어내려가면서 숨이 찼다.

밤샘 기사마감과 자정까지 이어진 팀장회의를 끝내고 8일 새벽 2시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웠으나 깨어 있는 의식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오전 9시. 눈은 충혈돼 있었다. 오전 10시에 가까스로 영등포역 앞에 도착했다. 햇살 보금자리 이원기 연구실장이 마중을 나왔다. 김성진 PD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었다. “긴장되지 않는가?” 이래봬도 사회부 기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긴장이 안 되겠는가”라고 말해버렸고, 내 솔직함이 그나마 맘에 들었다.

노숙인에게 다가서는 무거운 발걸음

자유의 집에서 취재하는 장면을 문화방송 김성진 PD가 촬영하고 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햇살 보금자리는 낮에만 문을 여는 작은 노숙인 쉼터였다. 이용자의 70%는 노숙인이고, 나머지 30%는 쪽방 거주자라고 했다. ‘입소’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노숙인의 실체를 인정하는 대신 그들의 노숙조건을 개선하는, 이른바 ‘드롭인’이다. 낮에 들러 추위도 녹이고 샤워도 하고 세탁기도 돌린다고 했다. 다음달이면 좀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 밤에도 들어와 잠자고 갈 수 있는 쉼터로 운영할 계획이란다.

몇몇이 소파에 앉아 신문과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입구에서 쭈뼛거렸다. 이 실장은 내게 물품창고를 정리하라고 했다. 수북이 쌓여 있는 바지, 속옷, 모포 따위를 차곡차곡 개어 치수별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단순노동 앞에서 겨우 안도했다. 그러나 노숙인 생활지도사 체험이 확정됐을 때의 안도감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나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이 쉼터에서 공공근로를 하는 김아무개(38)씨와 손발을 맞춰가며 물품을 정리해나갔다. 그는 영등포 자유의 집에 입소해서 돈을 모은 뒤 전셋값을 지원받아 독립했다고 했다. 노숙 경험은 없었다.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그는 날이 풀려 프로야구가 개막하면 잠실야구장 앞에서 장사를 할 생각이란다. 나와 김씨의 몸놀림을 카메라가 열심히 훑어나갔다. 직접체험이라는 낯선 취재를 하는 나를 카메라가 거듭 취재하고 있었고, 그 복잡한 함수 사이에서 나의 위치는 쉽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비지땀을 쏟았다.

오후 들어 노숙인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쉼터를 옮긴 뒤 어떻게 운영할지를 노숙인들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실장의 시도가 무모해보였다. 나는 가까스로 한쪽 소파에 몸을 구겨넣었다. 맞은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젊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못 오게 해야 한다. 아픈 사람, 나이든 사람이 우선이다.” 내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맞받았다. “겨울엔 일이 없는데 그런 기준으로 나누면 안 된다.” 나는 그들의 논리정연한 대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숙인과 비노숙인의 경계는 모호했다. 그들은 머리도 옷차림도 모두 깨끗했다.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은 것만이 그들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일하고 싶어했다. 내 곁에 있던 사람이 텅 빈 지갑을 탈탈 털어보여줬다. “나는 일을 보면 안 참는 성격이다. 막일하는 사람들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밤 10시 반에 잠자리에 든다. 우리만큼 노동시간이 긴 사람이 누가 있냐. 우리가 사람 대접 못 받을 이유가 뭐가 있냐.” 그는 “도와주지 않을 거면 무시하지도 말라”고 했다.

영등포역 주변에서 주로 지내는 이들은 이 역 공안으로부터 걸핏하면 경범죄 범칙금 딱지를 떼인다고 했다. 이들은 영등포역 공안을 ‘영등포 독사’라고 불렀다. 딱지를 떼는 사유는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걸 보고도 딱지를 뗀다.” “난 벌써 25만원이나 쌓였다.” 범칙금을 못 내면 기소중지되고,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지는 일도 자주 있다고 했다. “우리가 양아치가 아니라 그런 놈이 진짜 양아치다.” 충정로 사랑방으로 가는 길에, 나는 내가 양아치가 아닐까를 생각했다.

충정로 쉼터는 겨울철 자활사업으로 붕어빵 노점을 하고 있다. 입소자가 밀가루 반죽공장까지 직접 운영한다. 번듯한 상표도 만들었다. ‘www.붕어.빵’ 쉼터 담벼락에 붙어 있는 노점에서 입소자 아저씨가 빵을 굽는 모습을 눈여겨 지켜봤다. 반죽을 붓고 붕어모양 틀을 뒤집는 과정이 복잡했지만, 대신 규칙적이었다. “한번 해보면 안 될까요.” 아저씨가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허둥댔다. 순서가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10분 만에 틀 안에 있던 붕어빵을 거의 태웠다. 빙그레 웃는 아저씨 앞에서, 나는 민망했다.

자활 거들려 했건만 붕어빵만 태우고

자활의 의지를 가슴에 새긴 사람들. 영등포역 주변의 쪽방에서 쪽방 거주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붕어빵 태운 것을 만회하려고 저녁식사 뒤 설거지를 자청했다. 여기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순노동이었다. 수돗가로 식판 80여개와 그만큼의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이 쉬지 않고 들어왔다. 취사 공공근로를 하는 이곳 입소자 두명과 함께 쉴새없이 닦고 헹궜다. 아저씨들 손놀림은 날렵했다. “빠꾸!” 밥풀 하나만 묻어 있어도 마지막 헹굼작업을 담당한 아저씨가 여지없이 클레임을 걸었다. 어느새 무릎 밑으로 바지와 신발이 모두 젖었다.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릴 때쯤 일은 끝났다. 나는 이틀 동안 다리를 절었다.

설거지가 끝나고 입소자 방에서 상담이 시작됐다. 나에게 오롯이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난 상담할 수 없었다. 난 얼치기 생활지도사 체험기자였다. 난 그들을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노숙인 자활정책도 알지 못했다. 현장에 있어도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종원 간사가 동행해주지 않았다면, 끝내 방 안에 들어서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둥글게 모여앉은 입소자들 사이에 들어가 앉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쉼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 입에서 겨우 나온 첫말이 그랬다. 초등학생 같은 질문에 선생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쉬어가는 곳이다. 지친 영혼도 쉬고 몸도 쉬는 곳이다. 그러나 잘 쉬어야 한다. 잘못 쉬면 망가진다. 그리고 오래 쉬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그들로부터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 노숙인정책이 전시행정이라고 꼬집었다. 밥 세끼 줄 테니 들어가 앉아 있으라고만 했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함께 설거지를 했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이력서를 냈다가 거절당했다.” 그는 자동차 대형면허와 호텔 지배인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구속됐다가 몇달 전 가석방돼 이곳 쉼터로 왔다고 했다. 이날 이력서를 낸 곳은 마을버스 운전기사 자리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미 이야기가 다 돼 있었다. 그러나 버스회사는 이날 뒤늦게 그가 쉼터에서 산다는 걸 알고 태도를 바꿔버렸다. 그는 “이런 게 바로 진짜 체험이다”라며 쓰게 웃었다.

뒤늦게 방에 들어온 김도준 총무가 특유의 활기있는 목소리와 유머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세 바꿔놓았다. “웅크리지 맙시다. 물러나지도 비켜나지도 맙시다. 좀 당당합시다.” 자리를 정리하고 마당으로 나와 김 총무가 내게 이곳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어느날 처음 붕어빵 장사를 나간 입소자 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쉼터로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옆에 호떡장수 아줌마가 붕어빵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해서 불쌍해서…”라고 하더란다. 김 총무는 “야만적인 사회에 적응하기엔 너무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자정이 다 되어 충정로 쉼터를 나온 나는 김 PD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고단한 몸은 의자에 깊이 파묻히지 못했다. 나는 이틀째 선잠을 잤다.

거리의 사람들은 쉼터를 향하지 않았다

한 노숙자가 을지로3가역 계단 아래에서 라면을 먹고 있다(위쪽). 충정로 쉼터 앞 붕어빵 노점 일을 거들고 있다(아래쪽/ 박승화 기자).
9일 아침, 문래동에 있는 ‘자유의 집’에서 노실사 문헌준 대표와 박용범 사무국장을 만났다. 이곳에서 할 일은 쉼터 입소 희망자를 만나 입소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상담한 두 사람은 모두 다리 장애인이었다. 나는 몇 마디 질문으로 그들의 인생유전을 알아내려고 했다. 나는 취재를 하는지 상담을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한 사람은 얼마 전 처음 직장다운 직장을 가졌다가 장애 때문에 그만둔 사정을 얘기하며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카메라도 그 떨림을 잡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왔다. 서울역 부근 다시서기지원센터 사무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숙인 거리상담을 할 자유의 집과 쉼터의 실무자들이었다. 거리상담은 겨울 내내 매일밤 이뤄진다. 노숙인들의 동사를 막기 위한 응급활동이다. 그렇지만 이번 겨울에도 벌써 300여명이 거리에서 동사했다. 나는 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나눠준 노란 재킷을 입고 봉고차에 올랐다. 드디어 얘기도 되고 그림도 되는 내 체험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노실사 일행들과 함께 을지로2가역에 배치됐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긴장을 바람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서둘러 지나치곤 했던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는 저 풍경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한 여성노숙자가 라면봉지에서 끓인 라면을 건져먹고 있었다. “뭐 하세요?” “보면 몰라. 저녁 먹지.” “식사가 늦으셨네요?” “지금이라도 먹으니 다행이지, 뭘 자꾸 물어.” “자유의 집이라고 아세요?” “상관하지 마. 언제부터 지들이 날 걱정했다고.” 그의 고함소리에 나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섰다.

역사 통로 안으로 깊숙이 걸어들어갔다. 50줄로 보이는 한 남성이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벌써 소주병이 여럿 흩어져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붙들고 얘기해봐야 소용없으니 인사만 건네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던 한 실무자의 귀띔이 생각났다. 그러나 다들 취해 있어서 사람을 가릴 처지가 못 됐고, 신문 한장 깔지 않은 그의 자리는 당장 그날 밤이 위태로워 보였다. 내 질문과 그의 대답은 자꾸만 엇나갔다.

그는 그날 밤도 구걸한 돈으로 편의점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무료급식은 안 먹는다고 했다. 자유의 집에도 안 들어간다고 했다. 그것들은 다 요양원과 똑같다고 했다. 그는 가족에 의해 요양원에 강제로 처넣어졌고, 그곳에서 많이 맞았고, 주검도 여럿 치웠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도망나와 노숙한 지 4년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폐결핵 중증이어서 각혈도 하고 하혈도 한다고 했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거리는 한사코 추웠고, 따뜻한 자유의 집은 그에게 한사코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춥다”며 울먹였고 “아프다”며 울먹였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울어지지 않는 울음 소리를 들었다. 나는 끝내 그를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노실사 사람들과 김 PD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단 한명도 자유의 집에 입소시키지 못했다. 나는 다음 일정인 쪽방으로 서둘러 가고 싶었다. 쪽방체험이 아니라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영등포역 앞 편의점에서 술을 잔뜩 샀다.

쪽방은 비좁았다. 일곱명이 다리를 꼬고 앉아도 술병을 가지런히 놓을 수 없었다. 아저씨들은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미 취해 있었다. 젊어서 영등포역에서 소매치기 오야붕을 했다는 영등포 방울이(52) 아저씨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전날 햇살 보금자리에서 만났던 이아무개씨도 아랑곳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나는 두 사람의 얘기를 동시에 들어야 했지만, 어느 누구의 얘기도 귀담아듣지 않고, 술잔만 기울였다. 노실사 문헌준 대표와 햇살 보금자리 이원기 실장도 그런 것 같았다. 김 PD만 문 밖에서 열심히 카메라로 이 모습을 담고 있었다.

기약없는 약속… ㅎ신문이 뭐야?

자유의 집 상담실에서 쉼터 입소 상담을 하고 있다. 이날 상담했던 두 사람이 쉼터에 입소했다.
문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쪽방 주인 아주머니가 “시간이 몇시냐”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에게 “또 만나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하고 일어섰다. 노실사 사람들과 헤어져 김 PD와 함께 택시를 타고 신문사로 향했다. 그는 엔딩장면을 찍고 싶어했다. 나는 전날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서 내 소감을 얘기했다. 사무실에서 김 PD는 원하는 몇 장면을 더 찍고 떠났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사무실 야전침대에 몸을 뉘었다. 집이 그리웠다.

11일 오후 6시. <한겨레21> 사람들은 서둘러 기획회의를 마치고 TV 앞에 모여앉았다. 몇분 뒤 화면에 내 모습이 등장했다. 그 밑에 ‘ㅎ신문 주간지 안영춘 기자’라는 자막이 떴다. 사람들은 “뭐야” 하며 웅성댔다. “<한겨레21>이면 <한겨레21>이지 ㅎ신문 주간지가 뭐야.” 화면 속의 나는 뭐가 좋은지 뽀얀 얼굴로 연신 벙긋대고 있었다. 10분 뒤부터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섬으로 팔려갔던 '젊은 노숙인'

권일도(가명·22). 나는 그를 보면서 노숙인이 얼마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지를 새삼 깨우쳤다.

그는 내가 1월10일 밤 거리 현장상담을 나가기 전 다시서기지원센터를 찾아왔다. 햇살 보금자리 이원기 실장 말로는 그가 이날 밤 쉼터에 입소할 예정이며, 입소하기 전에 노숙인을 상대로 현장상담을 해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노숙인이 노숙인을 상담한다는 말에 나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 실장은 “이상할 게 없다”고 말했다. 노숙인이 노숙인을 돕는 ‘당사자 운동’이 외국에서는 보편화한 일이며, 노숙인들의 자주적 연대가 노실사의 주요사업 목표라는 것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직업학교를 나와 서울 문래동 ‘마치코바’(영세 철공소를 이르는 속어)에서 일했다. 6개월 동안 무려 500만원을 저축했다. 그런데 그만 국제통화기금(IMF)이 터지고, 6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으면서 벌어놓았던 돈도 다 까먹었다. 회사는 부도가 나 기숙사도 문을 닫았다. 한달 동안 일자리를 찾던 그는 결국 대림역 부근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9일을 굶었어요. 잠깐 졸기만 했을 뿐 잠도 거의 못 잤습니다. 그러다 서울역 앞에서 무료급식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서울역까지 걸어갔어요. 지금이라면 전철 무임승차를 하겠지만 그땐 그러면 큰일나는 줄 알았어요.” 그는 9일 만에 뜨거운 국물을 받아들고도 눈물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다. 굶으면서 남의 집 담을 넘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담을 넘을 힘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노숙하면서 무허가 소개업자를 통해 몇 차례 양말공장 같은 곳에 취직도 해봤지만 월급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영등포역에서 잠을 자다 인신매매꾼들한테 붙들려 전남 신안 염전에 끌려갔다. 섬이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하며 11월까지 일해 150만원을 받은 뒤 몸값 100만원을 까고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 서울역 주변 만화방에서 잠을 자던 그는 얼마 전 햇살 보금자리를 찾았다가 자활의지를 갖게 됐다. 그는 늘 서글서글하게 웃는다. 언젠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텐데 찡그리고 지내면 그때 가서도 얼굴이 안 펴질까봐 그런단다. 그는 지난 10일 나와 함께 거리상담을 한 뒤 다음날 남부노인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 입소했다.

“직업학교 다닐 때와 마치코바 있을 때를 합쳐 2년6개월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 같아요.” 그와 거리에서 헤어질 때, 나는 아직 앞날이 긴 그에게 다시 행복이 찾아오기를 빌며 내 명함을 건넸다. “때가 되면 연락 줘.”



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