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익살, 빛나는 재기
등록 : 2002-01-15 00:00 수정 :
연기자가 ‘빛나는 조연’이란 말을 듣는다면, 그건 성공의 징검다리에 들어섰다는 걸 뜻한다. 처음부터 주목받은 배우는 아니었지만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조연 구실을 몇번 잘하면 금방 주연급으로 떠오른다. 최근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킬러들의 수다>의 신하균씨가 대표적이다. 1월11일 개봉한 <아프리카>(감독 신승수)에서 조폭의 중간보스 정도되는 ‘날치’ 역을 능숙하게 처리한
이제락(40)씨는 ‘빛나는 재기’로 빛나는 조연의 입구를 두드린 경우다. 날치는 포커판에서 돈 잃고 총을 담보로 내밀었다가 그 물건이 엉뚱한 여성 4인조에게 들어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다. 똑같은 처지에 빠진 형사와 함께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일종의 코믹 로드무비를 이어간다. 형사는 경찰총을, 날치는 두목의 보배 같은 총을 잃었으니 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그 총을 찾아야 하는 공동운명체다. 이씨는 그 날치 역을 특유의 불량기에 능구렁이 같은 유머를 섞어 멋지게 해냈다. “생전 처음 해본 코믹연기”라지만, 그 익살스러움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불혹에 들어서야 연기의 방향 전환이 이뤄진 셈인데, 뒤늦게 재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더 반갑다. “<개같은 날의 오후> 등 몇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눈에 띄는 소득은 없었고, 96년 에스비에스 주말극 <행복의 시작>을 통해 얼굴이 알려졌으나 후속작이 없으니까 금방 잊혀지더군요. 곧 사는 게 두렵고 외로워졌어요. 어영부영하는 내 자신도 너무 싫었고.” 그래서 그는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으리라”고 맘먹고 9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먹고살 만큼은 벌었지만 어딘가 허전하던 차에 99년 여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귀국하면서 새로운 연기인생이 시작됐다. 물론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김호선 감독의 <실미도>에서 섭외가 들어와 1년 반 가까이 기다렸는데 결국 영화가 엎어지면서 물거품이 됐어요. 마침 김기덕 감독의 <실제상황>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빛을 볼 만큼 비중은 없었죠.”
<아프리카>에서 튀는 조연을 한 뒤 이제는 서너편씩 시나리오가 들어온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게다가 그는 ‘솔로의 여유’도 즐긴다. “아침에 눈뜨면 혼자서 청소하고 음식만드는 재미가 쏠쏠해요. 갈비탕을 만들어 1인분씩 냉동시켜 두는데 그게 맛보기 전에는 진가를 알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히다니까요.”
이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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