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구설수 “엔론을 부탁해”
등록 : 2002-01-15 00:00 수정 :
지금은 시티그룹 회장으로 있는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미국 월가의 냉혹하면서도 합리적인 투자은행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미국 최대의 부도사건으로 기록된 에너지기업 엔론과 관련해 구설수에 올랐다.
이른바 ‘엔론게이트’의 로비대상인 미국의 주요 관료들이 엔론으로부터 구제를 요청받는 입장에 있었던 반면, 루빈 전 장관은 엔론의 편에 서서 미 관료들에게 엔론 지원을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엔론이 파산하기 20여일 전에 피터 피셔 재무부 국내금융담당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신용평가기관들이 엔론의 신용등급을 즉각 하향조정하지 않도록 이들 기관들에 요청을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가 로비에 나선 것은 시티그룹이 엔론에 7억5천만달러나 되는 거금이 물려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루빈의 당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하더라도 루빈이 핵심관료를 대상으로 상당히 ‘불법적인’ 로비를 시도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엔론은 지난 97년부터 3년 동안 순이익을 5억6800만달러나 부풀리고 부채는 76억2800만달러나 줄이는 등 엄청난 분식회계를 통해 연명을 해오던 기업이다. 회계감사를 맡은 아서앤더슨도 이를 묵인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기업이 자랑하는 ‘투명경영과 회계’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업에 대한 로비를 맡은 것은 ‘합리적’이라는 루빈에게는 큰 타격임에 틀림없다.
루빈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지난 1997년 12월, 국가부도에 직면한 한국이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다급히 요청할 때 이를 단호히 거부해 한국인들의 애를 태웠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프로그램대로 부실기업 퇴출, 시장개방 등 강력한 경제개혁을 단행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국제통화기금을 압박해 한국이 고금리 정책을 선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상당수의 한국 기업들을 도산에 빠뜨리는 데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한국에 그토록 합리적 경제관행을 강요하던 그가 부실기업의 대명사격인 기업을 위해 로비에 나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엔론 사건은 루빈이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돈’과 ‘미국의 이익’이었음을 살짝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종생 기자/ 한겨레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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