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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DJ와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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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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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초연한 것은 타고난 의연함인가. 포연이 자욱한데도 의연한 것은 비범한 권력자의 생리인가.

마감시한 임박해 이뤄진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을 보면서 오버랩되는 이미지입니다.

기자회견 날 아침 신문에는 법치의 기둥인 검찰총장 사퇴가 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총장의 동생이 형을 배경으로 로비스트로 나서고, 그 형이 수사 검사들에게 봐달라고 전화를 한 의혹을 받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입니다.

바로 직전에 대통령의 수족인 국정홍보처장, 행정자치부 장관, 정보통신부 장관 등이 비리 벤처기업가에게 놀아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부패방지위원장 내정자가 또한 연루되고,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가 수뢰혐의로 구속됐습니다. 대통령의 수족이 줄줄이 비리혐의에 연루된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이뤄진 기자회견은 마치 딴 세상에서 딴 시간대에서 이뤄진 듯합니다. 기자들은 국민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많이 묻지 않고, 대통령은 국민들이 듣고 싶은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패척결에 불퇴전의 결의로 임하고 특별수사검찰청을 조속히 설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특별수사검찰청은 지난해 검찰 간부들이 비리의혹 사건에 연루돼 줄줄이 옷을 벗는 사태를 맞아 검찰이 발표한 개혁방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결국 ‘죄송’ 3번에 ‘불퇴전의 결의’라는 말의 치레에 그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러면서 경제도 살리고 월드컵도 잘 치르고 주택보급률도 높이고 뭣도 하고 뭣도 하고 백방의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그 목록이 늘어날수록 공허해 보입니다. 현실인식이 잇단 비리에 뻥 뚫린 민심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썩 유쾌하지 않은 기자회견의 근원을 찾아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정객의 강심장인가, 인의 장막에 가렸거나 무뎌져서 센스가 없는가?

꼬리를 무는 의문에 어느 중견 정치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최병렬 부총재. 그는 선거 하루 전날 “빗방울이 막 태백산맥 정점에 떨어진 상태와 같으며, 동해로 흐를 수도 서해로 흐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전인수하지 않고 백중세를 기자 출신답게 냉정하고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최근 “지금까지의 정치는 연극이었다”고 규정했습니다.

대통령님, 연극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자회견 다시 하세요.

“다른 일은 각 부처 장관들에게 일임하겠다. 단 나는 부패척결에 명운을 걸겠다. 부패방지위원회의 권능을 높이고, 공직자윤리법을 더 강화하고, 돈세탁방지법에 정치자금을 포함시키고…. 그리고 법적용을 엄격히 하겠다. 나는 한다면 한다. 권력과 돈의 생리를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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