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나의 길을 가련다”

392
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크게 작게

독보적 학문세계 구축한 나홀로 연구소장들… 그들의 참신한 도전이 빛을 내고 있다

이들의 연구소에 전화하면 예외없이 소장인 본인이 직접 받는다. 근사한 명패도 부리는 직원도 없다. 재택근무나 남의 사무실 곁방살이도 당연하다. 하지만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린다. 성과가 쌓이면 꼬박꼬박 책을 낸다. 독보적인 분야에다 독보적인 방법론이나 돈은 안 되는 연구들이다. 생계는 주로 아내가 떠안고 연구비는 지인들이 보태주기도 한다. 하지만 황토현문화연구소 신정일(48) 소장·한국레저산업연구소 서천범(44) 소장·대유연구소 윤상철(42) 소장은 홀로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은 ‘나홀로 연구소장들’이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덕분이다.

사진/ 산철을 연구소로 삼은 신정일 소장은 최근 1807km에 이르는 강따라 걷기를 마쳤다. 사진은 아우라지 정선으로 가는 한강 상류의 철길.(김현준)
황토현문화연구소 신정일 소장
잊혀진 역사가 되살아난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한 서민아파트. 114에서 안내해준 황토현문화연구소 전화번호는 신정일 소장의 집 전화번호이다. 85년 황토현문화연구회를 꾸렸을 때부터 줄곧 그의 집이 본부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산천이 모두 그의 연구소이다.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남녘기행은 벌써 120회를 넘어섰다. 한달에 꼬박 한번씩은 전라도땅 이곳저곳을 샅샅이 누비고 다닌 셈이다. 그 와중에 벌인 일도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전라세시풍속보존회를 만들어 지역축제의 모습을 바꿨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답사여행으로 정착시켰다. 전주의 크고 작은 2천여개의 길들에 원래 이름을 찾아줬고 각종 유적지와 향토박물관들이 제 기능을 하도록 했다. 또 동학군 장수들을 비롯해 신돈·정여립 등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과 철학을 복원해냈다.


전북지역 언론들이 꼬박꼬박 찾는, 향토문화와 역사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준비된 취재원’이나 신 소장은 여전히 재야 사학자이다. 할 일이 많아 대학의 교수초빙도 거절하고 쓸 글이 많아 이런저런 사업제의도 거절한다. 학자로서 이렇게 ‘튕기는’ 입장이 됐지만, 사실 그가 갖고 있는 정규교육 증명서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이다.

그는 전북 진안 깡촌에서 태어나 돈만 좀 만지면 노름으로 날리는 부친 밑에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3남1녀의 장남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20대 때는 평생 할 노동을 다 했다 싶을 정도로 몸을 굴렸다. 신제주가 막 개발되던 78년 제주도로 가서 ‘곰빵’ 일을 했다. 공사장에서 벽돌을 올리거나 모래를 퍼올리는 작업을 말한다. 제주 여객터미널, 그랜드호텔, 교육청, 한국방송 등을 지어올렸다. 벽돌 64장을 한번에 짊어지면 120kg. 하루 5천∼6천장을 져다 날랐다. “죽어라 일만 하니까. 제가 체력이 원래 안 좋은데 독하게 맘먹고 일하니 되데요. 체력보다는 집념이 노동의 동력이라는 걸 알았어요.”

80년대 전북지역 운동권들 가운데 전북대 앞에 있던 술집 ‘당천’(당신들의 천국)에서 학생증 한번 안 맡기거나 외상 술 한번 안 먹어본 사람은 드물다. 교사이던 아내의 월급날을 기다려 가게세를 겨우 메울 정도였으나 그의 오늘을 있게 한 값진 세월이었다. 시를 쓰던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과 토론하며 진로를 문화와 역사연구로 바꿨다. 단재사상과 동학철학에 눈뜬 것도 그때였다. ‘가방끈 긴’ 동지들은 김수영 시인의 표현대로 “방을 바꾸어” 흩어졌지만, 학벌도 배경도 없는 그는 계속 남았다.

95년 드디어 술집을 완전히 거덜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뒤 그의 연구는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다. 95년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를 시작으로 <모악산> <지워진 이름 정여립>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1, 2>에 이어 지난해 <금강, 401km> <섬진강 따라걷기> 등 모두 7권의 책을 펴냈다. 곧 출간되는 한강과 낙동강편을 합하면 그의 맹렬한 연구작업을 짐작할 수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도 극찬하는 그의 책은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발로 쓴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신 소장은 앞으로 북한까지 아우르는 <신택리지>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사진/ 서천범 소장은 건축설계회사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놓고 있다. 그는 폭발하는 레저수요에 걸맞지 않은 주먹구구식 행정과 개발을 질타한다.(김종수 기자)
한국레저산업연구소 서천범 소장
레저산업을 정녕 망칠 건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홀로 연구소장을 다루는 기사에 소개하고 싶다는 요청에 수화선 너머에서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대체 얼마나 외로웠으면? 한국레저산업연구소 서천범 소장은 ‘진짜 고독맨’이다. 그의 연구는 앞서 황토현문화연구소 신 소장과는 달리 주류학계로부터 비교분석이나 평가조차 받을 수 없다. 그는 한국 레저산업 분야의 유일한 연구가인 탓이다.

그의 연구소는 서울 여의도 정우빌딩 411호에 들어가서도 두리번거려야 한다. 한 건축설계사무소에 책상 하나, 전화기 한대, 컴퓨터 한대 놓은 게 집기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한국의 레저문화 산업에 대한 꼼꼼하고도 웅대한 연구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서 소장에 따르면 2003년 본격 도입될 주5일 근무제, 연간 휴가분산제와 맞물려 레저수요는 가히 빅뱅이 될 것이다. 하루 혹은 반나절치의 레저수요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숙박산업, 여행산업 등 부대산업까지 포함해 수십·수백배로 자가발전하리라는 이야기이다. 하루 4천대의 차량이 다니던 4차선 도로가 6차선으로 늘어나면 교통량은 6천대가 아니라 3만, 4만대로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지난해 가을 그가 펴낸 <2002 레저백서>에는 수백개의 표와 그래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자료가 꼭 필요한 관공서나 업계에서조차 돈 주고 책을 사려 하지 않고 내용만 얻으려 든다. 이 분야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함도 있고 연구저작권에 대한 무례함도 있다. 정가 2만7천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사실 그로서는 27만원을 받아도 모자란 연구결과이다. 산업별·업체별로 주지 않는 자료는 얼러서 얻어내고 없는 자료는 만들어서 갖고 오기를 반복한 결과이다. 이런 가운데 그는 레저산업 분야 어디에서든 제대로 된 현황 데이터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매번 놀랐다고 한다.

“지금은 혼자 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 혼자 할 일은 아니에요. 골프장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점점 더 수요가 늘고 폭발적인 이득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회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골프문화 산업 연구를 해야 해요. 국가적으로도 장려를 하든 규제를 하든 제대로 된 데이터를 갖고 정책을 세워야죠. 전체 산업규모나 지역특성에 따른 소득원이 분석돼야 세율이나 이용료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런 기초조사 없이 외국 사례만 들여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고,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관리감독을 하고 있죠. 엄청난 낭비입니다.”

무역학을 전공한 그는 대기업의 경제연구원이었다. 그러나 구제금융 한파를 거치며 그가 다니던 기아경제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당장의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는 탓에 대기업 구조조정의 1순위는 산하 연구소이다. 어쨌든 덕분에 그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무주공산에 깃발 꽂듯” 연구소를 차린 것이다. 자료수집부터 연구집필, 홍보출판까지 나홀로 하다보니 대기업의 그늘이 얼마나 따뜻했나 절감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얼마 안 된 퇴직금도 몽땅 털어넣었다.

특별히 노는 데 관심이 많아서 레저산업을 연구하는 것일까? 그는 레저산업을 경제연구원의 눈으로 연구한다. 경기가 나아지며 2000년 레저시장 규모는 14조9천억원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현상은 심해지고 국가 레저정책은 사행심리를 조장하며 두서없이 들썩이고 있다. 서 소장이 꿈꾸는 것은 건전레저문화창달. 자료를 뒤지고 데이터를 찾는 이유도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그의 눈에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 당장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과 중국의 관광객들에게 서비스할 대표적인 레저여행 포털사이트 하나 없다. “보통 서민이라고 해서 번지점프를 못하거나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지 말란 법은 없죠. 하지만 의외로 정보가 없어서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대별·지역별·계절별로 꼼꼼하게 맞춤서비스를 해주는 포털사이트를 만들고 싶어요.” 그가 출강하는 경희대 체육대학원 전공자 한명이 일을 거들겠다고 조르지만, 아직 책상이 하나밖에 없는 처지라 보류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주역 공부를 하다 천문학에 빠져든 윤상철 소장. 손에 든 것은 그가 복원해낸 우리 고유의 별자리 <태을천문도>(김종수 기자)
대유연구소 윤상철 소장
주류를 자극한 ‘별자리 과학’

북두구성? 생소한 이름이다. 서양의 천문학만 배운 우리는 북두칠성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몇년 전 세계 천문학계에는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자리 옆으로 두개의 별이 붙어다닌다는 보고가 나왔다. 망원경과 관측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그러나 이미 동양의 천문학에서는 옛부터 북두구신(北斗九辰)이라 하여 북두칠성이 아니라 북두구성으로 불러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동양학자인 대유연구소(대유학당) 윤상철 소장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자체 별자리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갖고 있을 정도로 천문학이 발달했다. 천문학의 르네상스는 15세기 세종 때였다. “북두의 나머지 두성은 결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동양학에서 관이 열린다고 하는데, 참선과 수행 끝에 보이게 된 게 아닐까 짐작하죠. 쿠데타로 권력을 얻은 왕일수록 집권하면 혜성의 움직임 관측결과부터 바꾸게 했죠.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별자리는 그만큼 보편화돼 있었고 또 그만큼 영향을 끼쳤던 거죠.”

동양의 별자리는 인간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임금이 있고 궁궐이 있고 신하가 있다. 백성이 사는 곳에는 시장이 있고 곳간이 있고 육로·수로가 있다. 부엌과 칼·도마, 심지어 변소와 똥오줌까지 다 있다. 이렇게 무한히 열려 있던 공간이 언제부터인가 닫혀버렸다. 일제 때 수많은 자료를 빼앗기고, 한문 연구가 쇠퇴하며 고서 해석을 못하고, 서양 천문학의 방법론이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맥이 끊긴 것이다. 끊어진 것은 천문학만이 아니다. 상보관계를 이루며 발전하던 모든 오래된 학문들이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서울 동대문 동묘 근처의 한 건물 3층에 자리잡은 대유학당은 끊어진 동양학의 맥을 잇는 산실이다. 바로 아래층에는 우리나라 주역연구의 일인자인 대산 김석진의 동방정신문화학회가 있다. 출판사를 겸한 대유학당의 상근자는 윤 소장과 출판영업담당 이부길씨. 그가 지은 책에는 대유학당의 선임연구원으로 소개되지만 윤상철 소장은 사실 대유연구소의 유일한 연구원이다.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던 그는 군대 제대 뒤 흥사단에서 우연히 주역강의를 듣고 동양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80년대 중반 대산의 말단 문하생으로 들어가 10여년간 고전 해석에 매달렸고, 4년여 전 독립해 지금의 대유학당을 차렸다.

1월5일 그를 인터뷰하는 내내 연구소 전화벨이 울렸다. 동양 천문학을 집대성한 <천문류초>가 이날 막 3번째 개정증보판을 낸 까닭이다. 문의자는 주로 교수들과 대학원생, 풍수지리학자, 그리고 대유학당에서 수학한 일반인들이다. 그는 <천문류초>를 현직 세무사이자 한문연구가인 김수길씨와 함께 공역했다. 99년 문화광광부 선정 우수학술도서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이 책은 잔주해석까지 해낸 값진 책자이다.

가끔 자신의 운세를 맞춰달라는 문의가 오기도 하지만 윤 소장은 거절한다. 자신은 큰 줄기를 보는 주역연구가이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예언가는 다른 사람 몫이라는 게 그 이유다. 윤 소장은 우리 민족은 유난히 예지력이나 직관능력이 발달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적인 자산도 갖고 있다. 바로 한글이다. “갓난아이가 제일 먼저 말하는 ‘옴’자는 가장 자연에 가까운 소리죠. 옴이라는 발음에 따른 뱃속의 진동은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합니다. 또 그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문자화한 것 역시 한글입니다.” 그러나 그는 점술이나 한글 같은 훌륭한 자산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유구한 연구성과들을 강단학계나 주류학계가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 것도 안타깝다.

대유학당의 유일한 수입원은 1천권 내외로 꾸준히 펴내는 해석서들과 매주 목요일 저녁에 모여 한문공부를 하는 이들의 수강료. 아주 가끔 윤 소장이 응하는 대학 특강료 등이다. 그의 연구작업을 높이 사는 각계 지인들이 쌈짓돈을 모아주기도 한다. 이렇듯 근근이 꾸려가지만 그는 대유학당의 문을 닫을 생각은 없다. 이름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까. 대유학당은 주역의 14번째 계인 화천대유계(밑에는 하늘 위에는 불이 있는 계)에서 이름을 땄다. ‘태양이 중천에서 대낮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이다. 달리 해석하면 ‘크게 소유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빛을 낸다’는 뜻이다.

“비록 혼자 한다 해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연구를 하는 것, 그게 학문하는 이의 자세겠죠. 요즘 절 욕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옛날에는 그저 무시했는데. 재미있죠? 패거리주의·권위주의는 학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보세요. 역사의 인물 중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은 당대의 세도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황토현문화연구소 신정일 소장이 말하는 ‘비주류의 주류학’이다. 외양과 매명에 신경쓰는 일부 ‘사람 많은 연구소’에 던지는 ‘나홀로 연구소장’의 쓴소리이기도 하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