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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B급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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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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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자음은 14개이고, 영어의 알파벳은 26개입니다. 그런데 한글에 비해 영어 알파벳은 묘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자 자체가 서열 내지는 위계질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ㄱ, ㄴ, ㄷ, ㄹ을 열거해보면, ㄱ이 ㄴ보다 높다거나 ㄹ이 ㄷ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파벳은 다릅니다. A, B, C, D는 곧바로 1∼4등의 순위를 가리키는 기호로 다가옵니다.

하기야 A라는 ‘상위 알파벳’이 들어가지 않아도 몇개의 알파벳이 합쳐져 너끈히 ‘최상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는 T와 K, P와 K, M과 K가 만나면 ‘지배’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특정 알파벳 대문자 조합이야 예외로 치면 A, B, C, D는 밑으로 갈수록 열등함을 표시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한겨레21>이 이번호 표지이야기(기사 48쪽)에서 이른바 ‘B급문화’에 주목하면서 용어선택을 놓고 고민한 것도 이런 대목이었습니다. A는 고상하고 우아하며 고급스럽고, B는 저급하고 천하며 유치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이미지가 일반화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ㄴ급문화로 이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이름이야 B급으로 붙이든 ㄴ급으로 붙이든, 아니면 아예 X급으로 명명하든, B급문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우선 B급문화가 유례없이 꽃피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화예술 분야는 물론 실생활에서도 B급은 파죽지세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A급이 B급을 모방하는 문화의 역전현상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B급은 누가 뭐래도 결코 A에 주눅들지도 않습니다.

B급에 대한 재평가 시도는 투박함, 촌스러움, 거침에 대한 재인식과도 연결됩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은근한 경멸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A급이라면 무작정 머리를 조아리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어렵고 모르는 것일수록 숭앙심은 높아집니다. 최근 들어 촌스러움이 오히려 상품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세련됨, 화려함, 미끈함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미덕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맨 처음 눈길이 가는 것은 그들의 옷차림이고, 그 투박함과 후줄그레함에서 묘한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단적인 예입니다. 본질과 외양의 혼돈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그렇다고 ‘B급 찬양론’을 펼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B급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솔직담백함과 기존의 통념에 구애받지 않는 발랄함입니다. 물론 B급도 나름대로 지켜야 할 금도가 있기는 하겠지요.

오히려 문제는 스스로 B급임을 표방하는 B가 아니라, A답지 못한 A입니다. A급을 자부하면서도 기실 그 내용이나 질은 B, 아니 C나 D에도 훨씬 못 미치는 ‘속빈 A’들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각 분야에서 일류, 아니 그것도 모자라 초일류가 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그에 걸맞게 A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외양만 그럴듯하고 내용이 따라가주지 못하는 A급은 아예 솔직한 B급만도 못합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의식만의 A급 상승이요, 도처에 널린 ‘가짜 A’들입니다.


그래서 B급을 들여다보는 진짜 효용은 이를 통해 진정한 A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B라는 거울을 통해서 본 우리 사회의 A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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