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02. 391호>
전공련 정책연구소장 김정수, 해맑은 얼굴로 ‘불법 공무원노조’의 깃발을 세운다
송파구공무원직장협의회 회장 노명우씨가 간부들을 이끌고 처음 우리 연구소에 찾아왔을 때, 40대 초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해맑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일행 중에 있었다. 그 사람은 모임이 끝날 무렵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공무원들이 앞으로 몇천명이나 해직당할까요?” 현행법에서 허용되지 않는 공무원노조를 준비하는 각오를 그는 그렇게 웃으며 표현했고, 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1600명이나 해직당하면서 길을 잘 닦아놓았으니, 공무원은 한명도 해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라고 답했다.
그 동안(童顔)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전공련)이라는 ‘불법단체’(어디까지나 ‘정부의 관점’으로는 그렇다)의 정책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김정수(42)씨다. 자신이 근무하는 송파구공무원직장협의회의 정책기획부장 일도 맡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전공련’의 정책이론가다.
어릴 적 ‘사장님’을 꿈꾼 이유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실직한 이후, 김정수씨의 가정 경제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기와공장을 어머니는 김정수씨가 대학을 마치고 결혼할 때까지 다녔다. 김정수씨는 옆에 앉았던 노명우 회장의 얼굴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런 얘기는 회장님한테도 아직까지 하지 않았는데…”라면서 조심스럽게 어릴 적 얘기들을 이어갔다. 김정수씨 역시 학창 시절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기와공장에 가서 어머니 일을 도왔다. 공장이라고 하지만 노상이나 다름없는 한데에 허름한 천막을 친 곳이었고,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서 기와를 찍어내야 하는 일이어서 먼지가 날리는 열악한 작업환경이었다. 남자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이었다. 겨울에는 사방을 비닐로 막아놓고 연탄을 때면서 ‘양생작업’을 해야 해서 늘 연탄가스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기와 만들기 기술자였던 어머니 옆에 지켜섰다가 어머니가 찍어 건네주는 기와를 받아 건조장까지 들고 가 가지런히 꽂는 일이나, ‘가다’를 쌓는 잔일이 정수 소년의 몫이었다. 찍어내는 기와 개수만큼 돈을 받는 도급제여서 정수 앞으로 임금이 따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수가 도와주는 만큼 어머니는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어머니한테 기와를 받아 건조장으로 들고 갔다가 공장 옆 공터에서 축구하며 노는 아이들이 있으면 한참 서서 구경을 하곤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빨리 돌아와야 할 놈이 안 오고 있으니까, 바깥으로 나오셔서 ‘빨리 안 오고 뭐 하고 있느냐’고 야단치시고 그랬어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얘기를 할 때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런데 김정수씨는 잘 참았다. 대신 인터뷰에 동행했던 나의 아내가 옆에서 눈물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나중에 아내는 “아까 그 대목에서 눈물이 나와서 혼났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말로 등록금이 없어서 1년을 쉬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동안 신문배달도 했고, ‘아이스께끼’장수도 하면서, 비정규학교를 6개월쯤 다녔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라난 정수 소년의 어릴 적 꿈은 고등학교 때까지 당연히 ‘사장님’이었다(참 신기한 일은, 웬만큼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김정수씨의 지금 얼굴에서 남다른 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에게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김정수씨가 귀하게 자란 부잣집 자식이려니 하고 자신있게 짐작하고 있었다). 80년대, 노동자와의 만남
대학에 들어간 해가 80년이었다. ‘민주화의 봄’을 겪었고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잠시 하기도 했고, 동대문의 야학에서 ‘강학’(講學) 일을 하기도 했다. 1박2일의 수련회에 가서 노동자들과 밤새 이야기하면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열었던 기억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사장님’의 꿈을 가슴에서 지웠다. 그 무렵 “얼마나 힘들게 공부시켜 보낸 대학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휩쓸려다닌다”고 혼쭐이 난 것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에게 가장 크게 야단을 맞은 기억이다.
87년 3월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호구지책’(糊口之策)이라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 나름대로 올곧은 생각을 정리한 뒤였다. “공무원을 흔히 정부시책을 그대로 좇아 수행하는 실무자 집단으로 알고 있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올바른 공무원이 되어야 하겠다’는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어요. ‘국민의 공복’이라는 말처럼 정말로 국민을 위한 일을, 국민과 함께 어울리면서,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그런 메리트가 분명히 있다고 기대했어요. 그렇게 노력하는 삶도 분명히 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요즘 공무원들을 만나면서 깨닫는 점 중의 하나는 김정수씨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거의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선한 노력들이 모여 현행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공무원노조’를 지향하는 것이리라.
2000년 4월, 김정수씨는 송파구청에 근무하면서 처음 ‘직장협의회’를 만들겠다고 ‘동지’들을 만났다. 모두 8명이 모였다. “노명우 회장하고는 공무원 임용 동기일 뿐만 아니라 나이도 같고 총무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절친한 동료였거든요. 그런데 직장협의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날 거기서 처음 만나서 알았어요. 서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럴 때의 기쁨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별 어려움 없이 600여명의 직원들을 모아 직장협의회를 출범시켰다. ‘남다른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는’ 노명우씨는 회장을 맡았고 ‘핵심을 잘 짚어내는 논리를 갖춘’ 김정수씨는 정책기획부장을 맡았다. 대표적 공무원 사이트에 ‘한길만’이라는 필명으로 꾸준히 글을 올린 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지,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이 출범하면서 정책연구소장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가 공무원으로서 송파구청에서 하는 일은 민주화운동보상신청 사실조사업무이다. 그는 거의 자원하다시피 그 일을 맡았는데, 수개월 전,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가 옆사람에게 절규하듯 말하는 걸 내가 엿들은 적이 있었다.
사명감으로 맡은 ‘민주화보상 업무’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은 올바르게 살겠다고 애쓴 진짜 노동자들이야. 지금 운동권에서 어떤 직책을 갖고 있거나 노동조합 간부도 아닌 사람들…. 농성장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구사대나 전경한테 얻어맞고 쫓겨나, 그뒤에는 취업도 안 돼 고생하는 사람들…. 진료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활동을 입증해줄 자료도 없는 사람들…. 어떻게 좀 유인물 한장이라도 좀 찾아보시라고 부탁을 해보지만 어디서 구해볼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진술조서를 최대한 잘 받아주는 일밖에는 없어. 정말 안타까워.”
그는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업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의로운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느꼈어요. 학생운동, 노동운동, 사학비리관련운동, 전교조, 자유언론운동, 공직자 숙정으로 희생당한 사람들,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갖가지 유형의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애환과 고통까지 다 드러내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해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인데 잘못하면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고 말 거예요. 보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조사해서 우리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런 의미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 생각나 “공무원노조를 준비하다가 나중에 해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했어요. 그 생각이 제 삶을 이끌어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선택이 그에게는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해맑은 얼굴이 그 해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아무리 고생을 시켜도 ‘세속의 때’를 묻힐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 때묻지 않은 얼굴로, 그의 희망 공무원노조가 온 땅에 물결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할 것이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송파구청 공무원인 그에게 '공무원노조' 라는 어려운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때묻지 않은 얼굴' 인지도 모른다.(박승화 기자)
어릴 적 ‘사장님’을 꿈꾼 이유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실직한 이후, 김정수씨의 가정 경제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기와공장을 어머니는 김정수씨가 대학을 마치고 결혼할 때까지 다녔다. 김정수씨는 옆에 앉았던 노명우 회장의 얼굴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런 얘기는 회장님한테도 아직까지 하지 않았는데…”라면서 조심스럽게 어릴 적 얘기들을 이어갔다. 김정수씨 역시 학창 시절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기와공장에 가서 어머니 일을 도왔다. 공장이라고 하지만 노상이나 다름없는 한데에 허름한 천막을 친 곳이었고,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서 기와를 찍어내야 하는 일이어서 먼지가 날리는 열악한 작업환경이었다. 남자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이었다. 겨울에는 사방을 비닐로 막아놓고 연탄을 때면서 ‘양생작업’을 해야 해서 늘 연탄가스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기와 만들기 기술자였던 어머니 옆에 지켜섰다가 어머니가 찍어 건네주는 기와를 받아 건조장까지 들고 가 가지런히 꽂는 일이나, ‘가다’를 쌓는 잔일이 정수 소년의 몫이었다. 찍어내는 기와 개수만큼 돈을 받는 도급제여서 정수 앞으로 임금이 따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수가 도와주는 만큼 어머니는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어머니한테 기와를 받아 건조장으로 들고 갔다가 공장 옆 공터에서 축구하며 노는 아이들이 있으면 한참 서서 구경을 하곤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빨리 돌아와야 할 놈이 안 오고 있으니까, 바깥으로 나오셔서 ‘빨리 안 오고 뭐 하고 있느냐’고 야단치시고 그랬어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얘기를 할 때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런데 김정수씨는 잘 참았다. 대신 인터뷰에 동행했던 나의 아내가 옆에서 눈물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나중에 아내는 “아까 그 대목에서 눈물이 나와서 혼났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말로 등록금이 없어서 1년을 쉬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동안 신문배달도 했고, ‘아이스께끼’장수도 하면서, 비정규학교를 6개월쯤 다녔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라난 정수 소년의 어릴 적 꿈은 고등학교 때까지 당연히 ‘사장님’이었다(참 신기한 일은, 웬만큼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김정수씨의 지금 얼굴에서 남다른 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에게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김정수씨가 귀하게 자란 부잣집 자식이려니 하고 자신있게 짐작하고 있었다). 80년대, 노동자와의 만남

사진/ 그는 민주화운동보상신청 사실조사업무를 하면서 우리 사회에 의로운 사람이 많다는 걸 절감했다. 그들을 남김없이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