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인의 선물
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그를 접하면서 대개 두번을 놀라게 됩니다.
한국에 대한 막힘없는 박학과 통찰력이 그 하나입니다. 토종 한국인보다 더 깊이 한국을 알고 그것을 정확한 우리말로 얘기하는 그를 보는 것은 경이롭습니다. 그런 그가 1973년생으로 이제 나이 서른이라는 사실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 서북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바로 ‘북유럽 탐험’ 코너를 통해 2주에 한번씩 우리 독자들과 만나는 오슬로국립대학 박노자 교수입니다. 그는 이제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인으로 정식 귀화 절차를 밟았습니다.
2년쯤 걸리는 귀화과정의 길로 들어선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학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또 아직까지도 국적과 혈통을 동일시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화두’를 하나 던져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한국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한국인이 되고 싶어하고 될 수도 있다면, 과연 한국인이라는 것이 핏줄로만 결정지어지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이 최근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으로 나왔습니다.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초상-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 전근대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부제가 질문에 대한 답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화두 혹은 질문이라고 했지만,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인이 된 그가 그 기념으로 동료 한국인들에게 바치는 뜻깊은 새해 선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거나, 어렴풋이 알거나, 혹은 너무 익숙해 잊고 지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명경지수에 한데 모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한국사회는, 루쉰이 <광인일기>에서 섬뜩하면서도 무덤덤하게 그려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사회입니다. 그는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병들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를 논해보고, 나아가 치료과정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온갖 게이트, 권력형 비리에다가 재벌의 돈놀음을 겪는 우리에겐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여기저기서 혼란스럽게 터지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같고 성격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의 근원을 왜곡된 근대성으로 진단합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자연스럽고 심지어 자랑으로 여기는 것들, 예컨대 집단에 대한 충성, 국가와 민족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생각을 하기 위해 ‘반란자’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는 분명 우리에게 반란을 선동합니다. 반란은 잠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지만 홍세화 선생의 말대로 그를 갖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복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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