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가부장
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최근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주도하는 이혼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아이 때문에, 경제적 곤란함 때문에 ‘참고 산다’는 여성들이 다수였던 과거에 비해,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이혼을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들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게 가족주의적 질서를 기반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왔던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에서도 나타난다. 마일라 스티븐스(Maila Stivens)라는 학자는 ‘젠더 불안정성’(gender instability)이 최근 아시아적 근대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중심적인 현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전통적 또는 문화적으로 고유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전형적인 성별관계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이전에 여성성이나 남성성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자질이나 성향에 대해 전면적인 도전이 일고 있다는 얘기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됐던 성 평등운동 이후 성별관계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서구사회와는 달리, 2000년대의 아시아는 세대간, 성별간, 종족간의 다양한 ‘가치들’이 경합하는 역사적 지점이 되고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맥락에서 연장자 남성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온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여러 층위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는 여전히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일탈적’ 범주로 취급되는 반면, 일본사회에서는 혼자서, 또는 결혼 제도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독신모(single mothers)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정서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 ‘빈 껍데기’ 남편에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엄마와 아이의 친밀성을 중심으로 가족을 구성한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섹슈얼리티 문제도 1990년대 들어 공적이며 정치적인 의제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혼외’ 또는 ‘혼전’이란 말로 강력하게 금지해왔던 이성간의 성적 결합들이 연애라는 보편적 언어로 설명되기 시작했고, 동성애가 문화·정치학의 주요 이슈가 된 지 오래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너무나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불안과 불만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경험과 가치관이 다른 세대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대안적 선택은 다른 집단엔 ‘위기’로 느껴질 수 있다.
익숙해 있던 것으로부터 결별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배제되고, 나의 가치관에 위반되기 때문에 부도덕해 보이고, 갑작스럽기 때문에 두렵고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단일한 가치가 추동해왔던 경직된 사회로부터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좀더 현실적이고 수용 가능한 대안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2년 전 싱가포르를 방문했던 경험을 상기해본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 유교주의적 가족 가치를 주요한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질서와 규율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이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가족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 공무원을 통해 싱가포르가 당면하고 있는 가족의 ‘위기’에 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능력주의 원칙에 따라 여성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양육이나 가사 일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결혼을 회피하는 비혼자(非婚者)들이나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새로운 가족의 가치를 위해
전형적인 핵가족이 붕괴하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할 위기를 감지한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가족의 가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나갔다. 즉 가족은 구성원 모두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족은 팀을 이루어 노력하는 것”(Family is a team-efforts)이라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이 정책에는 젊은 남편이 가사노동이나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교육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돈을 지원하는 것에서부터 ‘가족 친화적인 일터 만들기’를 통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육아 휴가를 주는 것까지 포함된다. 또한 추상적인 차원에서 강조되던 ‘효’의 개념에서 탈피해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여성들에게 노인 부양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부모를 모시는 사람들에게 재정 지원을 한다. 무엇보다도 노인들을 위한 활동센터(activity center)를 설립하여, 그들이 병약하고 의존적인 사람이 아닌 활동적인 사회인이 되도록 격려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여성들의 경제적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던 돌봄과 베풂의 역할을 사회가 분담하여 가족의 해체를 막고자 하는 의도였다.
싱가포르 정부의 노력이 가족 해체를 막고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의 결과라 하더라도 ‘가족의 가치’에 대한 개념을 좀더 현실화시켰다는 데서 신선함을 느꼈다. 서구의 복지국가가 아닌, 경제력은 강하지만 여전히 유교주의적 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수행하고 있는 이러한 노력들이 더 반가운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해를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에 도래할 새로운 개념의 ‘가족의 가치’를 상상해본다.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문화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