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죽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등록 : 2016-05-24 15:42 수정 :
서울 강남역 근처 어느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한 여성을 끔찍하게 죽였다. 피의자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사건 직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 쪽지가 붙기 시작했다. 온라인 역시 분노로 들끓었다. 이 사건을 두고 여성이라는 사회적 소수자 중 불특정 개인을 노린 범죄, 즉 ‘혐오범죄’(Hate Crime)라는 주장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경찰은 “피의자는 조현병으로 입원을 반복하는 등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고 진술만으로 동기를 해명하기엔 석연치 않다”며 혐오범죄와는 일단 선을 그었다. 속칭 ‘묻지마 범죄’라 불리는 이상동기 범죄 쪽으로 무게를 싣는 모양새다.
현시점(5월20일)에서 범죄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한다.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들은 있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지는 않았다. 혐오범죄법이 없고 관련 논의가 일천한 사회에서, 어쩌면 ‘묻지마 범죄’일 수 있는 살인사건에 대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여성혐오’ ‘혐오범죄’라는 말을 꺼내들었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며 다른 사람과 그 인식을 공유한다. 새로운 언어인 ‘여혐’(여성혐오)과 ‘혐오범죄’ 같은 말들이 사태를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명명하고 인식하는 촉매로 작용했을 수 있다. ‘나도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는 여성들의 보편적 공포를 함축했기에 저 언어들은 어떤 말보다 빠른 속도로 사회적 공감을 얻어왔다.
그런데 사건을 둘러싼 사회 담론들이 혐오나 혐오범죄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은 우려스럽다. 첫째, 혐오범죄냐 아니냐라는 대립 구도로 흘러가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실익이 있는지 의문이다. 혐오범죄란 인종,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정치적 지향, 종교 등에 대한 편견이 동기로 작용한 범죄를 가리킨다. 혐오범죄 개념은 이미 자체로 범죄인 행위에서 그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동기가 혐오범죄의 구성 요건에 부합하면 가중처벌하자는 것인데, 법이 인간 내면 상태를 판단하고 처벌해야 하니 쉽지 않은 문제다. 미국 등 몇몇 국가에선 법제화돼 있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한국에는 혐오범죄법이 없으며 관련 연구도 극히 드물다. 요컨대 관련법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혐오범죄냐 아니냐 실랑이하는 것은 공염불이 되기 쉽다.
둘째, 실익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과연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포괄하는 개념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한국의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확연히 높다. 살인, 성폭행, 추행, 폭행 등 극단적 폭력은 약자-여성을 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경제의 낙수효과는 허구지만, 폭력의 낙수효과는 진실이다. 여성이 빈곤할 경우 폭력에 노출될 확률은 더 높아진다. 이것이 ‘여성 대상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다. 그냥 만든 말이 아니라 앰네스티와 세계보건기구 등 여러 국제기구들이 공식화한 글로벌 어젠다이고, 한국 여성들은 가장 고위험군에 속한다. 이 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최근 들어 우리가 알게 된 어떤 개념에 의해 생겨난 현상도 아니다. 특히 폭력의 동기가 ‘여성혐오’만이 아니란 사실에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버지에 의해, 남편에 의해, 남자친구에 의해, 불특정 다수의 남성에 의해 지금 이 시각에도 어딘가에서 여성 대상 폭력은 일어나고 있다. 여성을 향한 폭력은 다양한 동기와 관계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참혹이다.
지금 강남역에 쪽지를 붙이고 꽃을 놓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단지 혐오범죄라는 특정 범죄 양상에 대한 반대로 소화되어선 안 된다. 이 분노와 애도의 물결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이상 손 놓고 지켜보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절규로, 이에 공감하는 다른 성들의 연대 선언으로 읽혀야 한다. 다만 여성의 안전한 삶에 더 많은 관심과 자원을 투여하는 일이 행여 CCTV와 경찰 권력 확대 등 ‘감시사회’와 ‘치안사회’로 귀결되지 않길 바란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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