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 지나간 줄 알았다. 아니었다. 활동가들의 집단사직 사태 3년 만에 또다시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이하 평박)가 휘청이고 있다.
크게 두 편으로 나뉘어 충돌하는 쟁점은 이렇다. 한편에선 ‘평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한홍구 이사(성공회대 교수)의 독선과 전횡, 단체 사유화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에선 ‘후원회원 관리를 게을리한 석미화 사무처장이 사안을 왜곡하고 한홍구 이사를 음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21>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평화·반전 운동의 핵심적인 몫을 해온 평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해법은 있는지 취재했다.
우선 5월10일 평박 누리집( www.peacemuseum.or.kr)과 5천여 명 회원들에게 공개된 사무처 활동가들의 입장문과 증빙자료, 그리고 이를 반박하는 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이사장 명의의 입장문과 증빙자료를 두루 검토했다.
아울러 관련자의 증언과 입장을 최대한 많이 청취했다. 사건이 점화된 3월28일 34차 평박 이사회를 기준으로, 이사 14명(감사 포함) 가운데 당사자인 한 이사와 석 처장, 현재 국외에 있는 홍순관 이사, 2014년 7월 이후 이사회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던 김종길 이사를 뺀 10명의 견해를 모두 들었다(표 참조).
사안의 핵심 당사자 가운데 1명인 한홍구 이사를 5월11일 오후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1시간50분가량 만나 한 이사의 입장을 직접 들었다. 석미화 처장 또한 서울 종로구 평박 사무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전직 평박 사무처 활동가 4명을 전화 인터뷰했으며, 현재 평박 내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에 소속된 팀원도 취재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_편집자
사안을 둘러싼 논란과 함께 관심도 깊어졌다.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김옥주 할머니가 ‘한-베 평화역사관 건립기금’으로 써달라며 7천만원을 내놓았고, 이를 종잣돈 삼아 평박이 추진됐다. 이후 여러 노력 끝에 2003년 지금의 평박 설립이 공식 추진됐고, 2006년 사단법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평박이 누리집 등에 밝힌 주요 사업은 베트남과의 평화 교류와 지원, 탈핵 평화운동,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 평화·인권을 주제로 한 전시사업 등이다. ① 충돌하는 쟁점은 무엇인가 평박 사무처의 석미화 처장과 최성준 총무 활동가 등은 5월10일 평박 누리집에 ‘입장문’(평화박물관 한홍구 이사의 전횡과 시민단체 사유화에 대한 사무처의 입장)을 올렸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홍구 이사가) 서울 종로구의 50평대 아파트를 사실상 개인 연구실처럼 사용. 다달이 100만원가량인 관리비와 운영비 모두 회원들이 납부한 회비로 지출. 전세보증금 5억5천만원 가운데 3억5천만원이 평박 공금이고 한 이사가 부담한 액수는 2억원. 설거지·청소 등 활동가들이 ‘가사도우미’ 역할까지 부담. 3년 전 활동가 집단사직에 이어 지난 2월 활동가 부당해고. 회원 관리에 별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는데도 수용하지 않고 사무처를 음해. 활동가들에게 부당한 업무 지시와 폭력적인 언행. 근무하지 않는 활동가에게 재판 부담을 이유로 9개월간 부당 급여 지급. 반면 변호인으로 승소를 이끌어낸 상임이사에게는 수임료 지급 전혀 안 함.’ 이에 대해 한 이사와 이해동 이사장은 하루 뒤인 5월11일 평박 누리집에 반박문을 올렸다. 석 처장 등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고 회원 관리 업무를 게을리한 사무처의 왜곡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의 책임 편집인이고 개인 자금 2억원 등을 부담했으므로 아파트를 사무실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지난 2월 퇴사한 활동가는 2015년 12월 뽑을 때 처음부터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팀’에 배치하려고 한 것이다. 본인이 배치를 거부하고 평박 사무처 쪽에서 일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스스로 퇴사한 것이다. 반면 사무처가 후원금 중 최소 매월 340여만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게 감사보고서에서 밝혀졌다.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오히려 한 이사와 이사장을 음해. 2013년 평박 활동가 6명이 한꺼번에 떠난 것은 스스로 사직한 것. 경찰·검찰 조사와 재판 대응에 필요한 노력과 마음고생을 한 활동가에게 활동비를 지급한 것일 뿐이다.’ ② 자동이체시스템(CMS) 등록 문제 한 이사는 자신이 모집한 후원 신청서를 사무처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2014년 12월~2015년 8월 자신이 약정을 받아온 월납 후원금 가운데 최소한 매월 340여만원, 총액 3천만원가량이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사무처는 최근 CMS 원자료(7천여 명)를 일일이 다시 분석한 결과, 한 이사가 주장하는 금액과 비교해 90%가량 실제 입금이 됐고, 최초 약정서의 기록 미비 등을 감안하면 다른 시민단체 등에서도 일어나는 일반적 수치라는 입장이다. 법인 감사보고서가 그 실체를 밝혀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감사보고서가 1차와 2차 두 개라는 데 있다. 3월28일 문제의 이사회에서 공개된 1차 감사보고서는 석미화 사무처장의 주장을 인정했다. “중요한 예외사항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종합검토의견) 그러나 20일 뒤인 4월18일 작성된 2차 감사보고서는 한홍구 이사의 손을 들어줬다. “정상 처리되지 않은 회비의 규모는 (월) 최소 348만5천원.”(결론) 2개의 감사보고서 모두 평박 이사진 중 1명인 김성구 감사가 작성했다. 그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CMS 원자료를 본 것은 아니다. 자료 자체는 사무처에서 제시된 게 전부다. (그러나) 2차 감사보고서가 움직일 수 없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덕우 이사(변호사)의 의견은 김 감사와 다르다. 그는 “나도 감사한테 물어봤다. 로데이터(CMS 원자료) 보았느냐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모셔서 원자료를 보고 사실관계 밝힌 뒤 논의하는 게 맞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하는 건 편파적일 것 같다.” ③ 조직 운영 방식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김남수 활동가다. 그는 2015년 12월 채용된 뒤 불과 2개월 남짓 만인 올해 2월 퇴직했다. 그는 퇴직 과정과 이유를 설명한 입장문(이달 초 작성)의 뒷부분에서 “‘민주’를 얘기하나 반민주적 행위가 몸에 밴 인사와 더 이상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본적인 소통조차 본인의 뜻대로 일도 사람도 ‘다루는’ 인사가 어떻게 명사(名士)가 되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한 이사는 <한겨레21>과 인터뷰에서 “내가 보니까 같이 일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면접 때 봤으면 절대 안 뽑았을 거다. 견해가 갈리면 내가 결정하게 돼 있는 거다, 내가 이사회를 대표하니까”라고 반박했다. 2013년 12월~2014년 1월에도 평박 사무처 활동가 7명 가운데 6명이 집단사직하는 일이 있었다. 전시 담당 활동가 1명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점을 동료 활동가가 문제 삼으면서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와 갈등이 커졌다. 당시 활동가 6명은 ‘사퇴의 변’에 이렇게 적었다. “저희가 겪어온 일을 계기로 ‘조직 내 민주주의’와 ‘시민단체의 사유화’에 대해 시민사회에서 공론화하는 장이 열리기를 바라며, 평화박물관을 포함해 시민사회단체 어디에서도 저희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당시 사직한 활동가 중 한 사람은 <한겨레21>과 인터뷰에서 “한 이사는 문제를 인정하고 고쳐나가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문제 제기하는 활동가들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평박을 운영해왔다. 평박을 한 이사 혼자 만든 게 아니다. 회원들과 활동가들이 같이 만든 거다. 결정권이 자신한테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문제다”라고 말했다. 다른 전직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엔 활동가들이 노동자로서 의식이 별로 없었다. 노동자로서 자기 권리를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한홍구 이사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 환경이 바뀌고 있다. 전반적으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시선 등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다른 전직 평박 활동가의 말이다. “한 이사가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해서 ‘이렇게 합시다’ 했을 때 이사장이 승인하고 그대로 처리되는 관행을 계속 지켜봐왔고 언젠가는 사무처를 위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석미화 처장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무처장으로서 지위와 역할이 있는데, 그런 관행들을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 묵인하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한홍구 이사의 주력사업인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팀 쪽은 전·현직 평박 사무처 활동가들과 견해가 달랐다. 한 팀원은 <한겨레21>에 “철저히 내부 문제인데 (석 처장이) 외부로 가져간 건 외부의 힘을 빌려 풀려고 한 거로 본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이 권력자를 심판하는 건데, 심판하는 사람을 이렇게 흠집내면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이사 또한 강하게 반박했다. “단체에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의 발언권이 세지는 거다. 이사회에서 그런 얘기도 나왔다. ‘왜 한홍구 말대로 하느냐, 한홍구가 일을 많이 했으니까’라고.” 이해동 이사장도 비슷한 생각이다. “석미화 처장의 문제 제기는 평박의 역사를 무시해버린 처사다. 평박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진행돼왔고 이런 걸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그러고는 한홍구가 전횡을 한다든지 그런 얘기는 말이 안 되는 얘기다.” ④ 평박의 미래 또 하나의 쟁점은 평박의 미래다. 한 이사는 평박 사업을 축소하고 반헌법팀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평박에서 손 떼고 반헌법 일만 하고 싶다. (평박의) 상임이사가 새로 선임됐고 사무처는 재구성될 거다. 석 처장은 이사회 차원에서 중징계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니 절차 밟는 것만 남았다. 평박 사무처 공간은 폐쇄할 것이다. 나머지 활동가 2명은 반헌법팀으로 재배치할 것이다. 평박 사무처는 벌여놓은 일도 없다.” 다만 한 이사는 “정관의 사업 목적에서 평박 사업을 뺀다는 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 이사의 뜻대로라면 평박 사무처에서 베트남 관련 사업, 원폭 2세 관련 사업을 모두 떼어내고 ‘스페이스99’에서 이뤄지는 전시사업 하나로 축소된다. 현재 활동가(연구자 포함) 비율은 반헌법팀 16명, 평박 사무처 3명이다. 평박에서 시작한 사업이 반헌법 사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셈이다. 석 처장도 평박 사무처를 계속 끌고 나갈 처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석 처장은 “최근까지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평박을 사실 떠나고 싶다. 다만 징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반헌법’의 한 팀원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평박은 평박대로 가고, 반헌법팀은 독립법인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사회도 흔들리고 있다. 지난 3월28일 이사회 전후로 이사 3명이 사퇴했다. 또 다른 이사 1명도 <한겨레21>과 통화에서 조만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익명을 요청한 그는 “평박 사무처는 누가 봐도 깨진 거다. 이제 평박 운영은 엔지오(NGO) 식으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 ⑤ 갈등과 논란의 해법은 어디에 관련자들의 극심한 대립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 이사직을 사퇴한 장혜옥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은 5월2일 작성한 ‘이사직 사퇴서’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반헌법자인지 묻고 싶습니다. 반헌법자는 지나간 역사와 법정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민주주의 실체여야 할 평화단체에 한 줌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청년노동자들에게 갑질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바로 반헌법 행위임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평박 초창기부터 참여해 건립기금 모금 공연(‘춤추는 평화’)을 이어온 홍순관 전 이사(가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이렇게 썼다. “평박에서 저질러진 천박하고 폭력적인 행태에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이 당하는 아픔과 부당한 해고 등을 옆에서 보며 함께 해결해보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이사장께도 마음을 다해 요구합니다. 더 이상 평박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번 일에 책임을 지는 행동을 보여주시고 평박의 정상화와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반면 이해동 이사장은 사무처 등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다. “이런 경우에는 원칙대로 하는 길밖에 없다. 이사회 결정대로 수순을 밟는 길이다. 석 처장은 현재 (상황) 자체만으로도 평박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한홍구 이사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석미화 처장과 최성준 활동가는 평화박물관 자체를 깨고 싶어 하는 거 같다”고 했다. 반헌법 팀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 이사가 평박에서 손을 떼려고 했기 때문에, 기금사업 위주로 가려고 한다는 얘기를 올해 초에 들었다. 아마 석 처장은 동의 안 했을 거다. (그 이후) 서로 악마화해놨는데 화해가 될 수 있을까.” 평박 사태 해결의 열쇠는 무엇일까. 평박 정관 제2조(목적)는 이렇다. “본 회는 전쟁과 폭력의 고통을 기억하며, 생명·인권·평화의 가치와 철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평화박물관 건립을 목적으로 한다.” 평박의 전직 이사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평박은 명백히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평화박물관 사태’에 대한 이사 10명의 판단 요지
<평화없는 평화박물관> 관련 반론보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