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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상수] 아, 이게 생명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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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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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기자의 한해 농사 체험, 그 행복한 충격과 감동의 기록

고추 열 포기(매운고추 다섯, 맵지 않은고추 다섯) 가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풋고추와 양념으로 즐기고도 빨강고추를 수확해 보름동안 잘 말린뒤 절구에 빻아 겉절이 배추 닷서 포기를 담그는데 충분히 쓸 수 있었다.
이걸 가지고 어디 가서 ‘농사를 지어봤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나름대로 본인에겐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고, 다른 분들에게도 한두 가지 참고할 점이 있을지 몰라, 신선한 충격과 감동이 살아 있을 때 기록에 남기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이여, 이 미역국을 제가 끓였나이까”

이야기는 둘째아이를 가질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2000년 용의 해, 둘째아이 출산을 앞두고, 본디 자연을 좋아하는 성품인 아내가 시골로 내려가 아이를 기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기자 생활이란 게 알다시피 허구한날 술과 야근을 반복하게 마련이다.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번엔 아내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사직까지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무급휴직이라도 얻어내기 위해 회사에 의사를 타진했다. 몇 가지 곡절을 겪은 끝에 9개월 무급휴직의 소중한 시간을 얻어냈다.


강원도 연곡에 집을 얻어 내려간 건 그해 가을, 연두색 감이 수줍은 분홍빛을 조금씩 더해가던 9월15일이었다. 열네 가구가 사는 마을엔 오팔년 개띠 노총각이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육순이면 ‘젊은 층’이고 칠순이 보통이다.

이사온 날로부터 꼭 한달 뒤인 10월15일 둘째아이 준희가 태어났다. 난 “나의 경쟁상대는 평양산원”이라고 공언하며, 나름대로 지극 정성을 다해 아내의 산간을 했다. 첫 미역국을 끓였을 때, 난 국그릇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외쳤다. “신이여, 정말 이 미역국을 제가 끓였나이까!”(그날 저녁, 어떤 상황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올곧은 성격의 아내는 “쓴맛이 돈다”는 촌평 한마디로 남편의 가슴을 허물어뜨렸다. ㅜ.ㅜ “신이여, 아무래도 그 미역국 제가 끓인 게 맞나봅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폭설에 묻힌 강원도 농촌의 작은 마을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포근했다. 이런 폭설이 30년 만이라던가, 50년 만이라던가. 대관령이 몇번 끊겼다 이어지길 되풀이하더니, 어느새 언 땅이 한낮의 햇살에 녹았다 밤새 다시 얼기를 되풀이하며 봄을 부르는 제의를 올렸다. 봄은 더디고 더딘 걸음으로 다가왔다.

봄이 오면 풍광도 잿빛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시든 풀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순이 솜털처럼 돋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그 작고 여린 움틈이 세상을 온통 흔들어 깨운다. 할머니들은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뒷짐을 지고 논두렁과 들판길을 쏘다니기 시작한다.

“뭘 좀 캐셨어요?”

“달래도 별로 없네….”

봉지 가득 담긴 달래를 보여주는 북두갈고리 같은 할머니의 굵은 손마디에 봄의 설렘이 향기롭게 묻어 있다.

여기저기서 겨울의 흔적을 태우는 냄새도 봄이 오는 신호의 하나다. 지난 1999년 고성에서 큰 산불이 난 뒤로 강원도는 불피우는 행위를 매우 엄격하게 단속한다. 매일 헬리콥터가 두번쯤 떠서 구석구석을 내려다본다. 걸리면 벌금이 최하 50만원이다. 봄바람이 매섭기 때문에 불티가 날아가면 큰불로 번질 위험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폐비닐 태우는 냄새에서 받은 충격

그럼에도 농촌사람들은 이것저것 온갖 것들을 다 태운다. 주로 헬기가 뜨지 않는 이른 아침과 초저녁 시간을 노린다. 아침저녁으로 조깅을 했는데, 들판 한가운데서 심호흡을 하다보면 갑자기 매캐한 비닐 태우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밭에 썼던 폐비닐 태우는 냄새다.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보더라도 농촌에서 배출하는 폐비닐의 양은 엄청날 것 같다. 감자나 고추 따위의 농사를 지을 때 비닐로 밭이랑을 덮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 이걸 걷어서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고이 넣어 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도나도 새벽과 초저녁 시간을 이용해 태워버린다. 그러니 조깅하면서 울고 싶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비닐 태우는 냄새 맡으며 조깅하려고 여기까지 왔던가. 시골 분들이 순박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이대로 두면 환경이 금세 망가지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텃밭농사 지으며 어렵게 잡초와의 전쟁을 치른 건 순전히 폐비닐 태우는 냄새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전세로 얻은 집 바로 앞에는 뻣세진 망초 대궁이 가득 들어찬 주인집의 묵정밭 600평이 길게 드러누워 있다. 집 왼쪽에도 70평 남짓한 텃밭이 달려 있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텃밭은 그냥 지어먹어도 좋고, 600평짜리 밭은 한해에 20만원을 내라고 했다. 농사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600평을 짓는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고, 또 20만원의 ‘소작료’를 벌충할 만큼 수확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워 일단 ‘공짜’인 70평짜리 텃밭만 일구기로 했다. 지대 납부 부담에서 자유로운 행복한 소작농이 된 것이다.

지난 4월23일, 면 농협에서 퇴비 비료 열 부대와 복합비료 두 부대를 사서 뿌린 뒤 동네 트랙터를 빌려 로터리를 쳤다. 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지 않더냐. 다른 동네 어르신들보다 열흘쯤 늦게 시동을 건 셈이다. 옛날엔 소에 쟁기를 걸어 갈아엎었지만 지금은 트랙터에 회전삽날을 걸어 밭을 갈고 흙을 곱게 분쇄한 뒤 이랑과 고랑을 낸다. 쟁기로 가는 것보다 훨씬 깊게 갈 수 있고 흙도 훨씬 보드랍다.

동네에서 가장 젊은 내가 텃밭이나마 농사를 짓겠다고 로터리를 치니 대견해 보였던지 동네 어르신들이 한분 두분 모여들었다. 그런데 기와집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시더니 “고맙소∼” 하시는 거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마우시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지금 누구네 밭을 로터리치고 있는 거지?’

“지나 댕기다가도 밭이 묵어 있는 걸 보면 맘이 안 좋은데, 이렇게 젊은 사람이 밭을 갈아주니 얼마나 고맙소? 동네 한가운데 묵은 밭이 있으면 이웃에서 누가 와보더라도 부끄럽고….”

이게 바로 농부의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내 밭이 아니더라도 묵어 잡초 우거진 걸 보면 절로 한구석이 아파오는. 흙에서 자라 흙을 믿고 흙을 가꾸며 살아온 늙은 농민의 마음 씀씀이란 이러하구나.

로터리치는 걸 어떻게 알고 까치 두 마리가 날아들어 분주하게 트랙터 뒤를 따라다닌다. 새로 갈아엎은 땅 속에서 기어나온 벌레를 쪼아먹기 위해서다. 저 녀석들이 나보다 농가의 사계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입고참이라고나 할까.

“그러면 토마토가 아프잖아…”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박 두덩이 속을 파내며 바가지 긁는 소리가 어떤 건지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금은보화가 나오진 않았지만 질박함만으로도 하늘이 내린 그 어떤 선물보다 더 값진 보물이었다.
빈 다이어리 하나에 <영농일지>라고 제목을 쓴 뒤 ‘경작계획’을 메모하니 벌써 농부가 다 된 것 같다. 강원도니까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기본이고, 호박, 고추도 따먹어야지? 고기 궈먹으려면 상추, 깻잎, 파도 필요하고. 아, 가지도 부쳐먹자. 바로 겉절이해먹으려면 얼갈이도 심어야지? 여기에 방울토마토, 참외를 더 추가하고, 옆집 할아버지가 주신 양대와 딸 슬비가 얻어온 완두콩도 심었다. 70평이지만 호박 열 포기, 고추 열 포기, 가지 세 포기, 방울토마토 다섯 포기, 깻잎 세 포기, 얼갈이 한 봉지, 참외 다섯 포기, 고구마 한단, 감자 한 박스, 옥수수, 양대, 파 등 네 식구가 먹을 푸성귀를 심는 데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나중에 헤아려보니 모두 열네 가지를 심었다. (<영농일지>를 들여다보니 묘종과 씨앗값으로 2만9천원, 비료값이 2만6천원, 로터리친 값 2만원, 호미와 괭이 사는 데 1만5천원 정도가 지출됐다. 소작료 부담도 없는 소작농인데, 아무리 농사를 못 짓는다 한들, 이 정도 ‘본전’도 못 뽑으랴!)

종류가 많다보니 잔손질할 것도 많았다. 가령 방울토마토의 경우는 지난해 농사 중 가장 화려한 성과를 거둔 분야가 아닌가 싶다. 포기마다 막대를 세워주고 늘어지는 가지를 일일이 끈으로 묶어주어야 하고 가지 사이에 나는 젖순은 따주어야 한다. 정성을 들인 만큼 방울토마토는 무려 석달열흘 동안 꾸준히 우리 식구들에게 열매를 제공했다.

젖순을 따주어야 하는 건 고추도 마찬가지다. 너무 곁가지가 많으면 집중력이 떨어져 이것도 저것도 안 되므로 젖순을 따주는 거라고 한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이든 식물이든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초보 농사꾼인지라 동네 할아버지들의 자문을 많이 구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들은 “내가 농학박사는 아니지만…” 하며 운을 떼고는 물어본 것보다 하나씩 더 가르쳐주신다. 지나가다가도 ‘저 어린 친구가 제대로 하고 있나’ 궁금해서 한번씩 우리 밭을 들른다.

한번은 내가 방울토마토의 젖순을 따고 있는데 기와집 할아버지가 밭에 들르셨다. 마침 잘라내고 있던 젖순의 밑동이 딱 잘라지지 않고 본줄기에 거스러미가 길게 일어났다.

“그러면 토마토가 아프잖아.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딱 끊어버려야지.”

정말 그렇구나. 딱 끊어낸 다른 곳에 비하면 거스러미가 일어난 곳은 내가 봐도 아파보였다. 나중에 토마토가 더 자랐을 때 보니, 젖순을 깨끗하게 잘라낸 곳은 말끔하게 아물었는데, 거스러미가 일어났던 곳은 나무의 옹이처럼 굳어 있었다. 토마토가 상처를 아물게 하느라 애쓴 흔적이 눈에 보였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빈말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타는 가뭄, 잡초와의 전쟁

그뒤로도 동네 할아버지들은 내가 뭘 여쭤보면 “내가 농학박사는 아니지만…” 하며 열심히 가르쳐주셨다. 그런 겸사를 들을 때면 난 이렇게 답했다. “경험대학 농학박사시잖아요….”

4월25일 감자를 심었다. 조금 늦은 편이었다. 농협에서 씨감자 한 박스를 사왔는데, 씨눈을 제대로 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사천의 중산간 마을에 사시는 고씨 할아버지께 가져가서 씨눈을 따왔다. 다음에 감자농사 지을 땐 직접 눈을 따볼 생각이다.

감자를 심으며 사실은 속으로 ‘제발 싹이라도 나다오’ 하고 빌었다. 며칠 부산을 떨며 밭을 일구고 감자를 갖다 심었는데 싹마저 나지 않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러니 나중에 수확은 어찌됐건 일단 싹이라도 나주면 고맙겠단 생각이었다. 막상 감자와 옥수수의 싹이 돋기 시작하자, 이젠 ‘열매가 크지 않아도 좋으니 열리기만 해다오’로 갈망이 바뀌고 있었다.

한번은 한낮에 밀짚모자를 쓰고 김을 매고 있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또 한 가지를 가르쳐주셨다. “일은 새벽하고 초저녁에 하는 기다. 땡볕에 일하면 건강 해친데이∼.”

과연 그랬다. 그래서 근무시간을 새벽과 초저녁으로 바꿨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밭에 나가보면 뒷집 과수원집 할머니와 며느리, 길 건너 할아버지, 그 옆집 할머니네와 기와집 할아버지 등 동네 어르신들이 다 나와 자기 밭에서 일하고 계신 걸 볼 수 있었다. 그래, 이게 제대로 된 근무시간이구나.

한번은 갓난아기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깨어 새벽 다섯시에 밭에 나가본 적도 있는데, 그때도 이미 다들 나와 밭일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부지런한 분들이로구나.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난 봄은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했다. 강원도도 마찬가지였다. 작물들이 비실비실거리는 걸 보니 더럭 겁이 났다. 섣불리 물을 주면 작물들이 가뭄을 더 탄다고 해서 물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제초라도 해주어 ‘경쟁자’를 제거해줘야 한 방울의 물이라도 작물들이 빨아들일 것 같아, 땡볕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다. 초봄에 밭에 난 잡초란 콩나물의 10분의 1 크기도 안 되는 아주 작은 것들이다. 이걸 엄지와 검지로 잡고 쏙 뽑아 올리면, 우선 뿌리가 매우 길다는 데 놀란다. 저 가녀리고 연한 뿌리가 물을 찾아 밑으로밑으로 뻗어내려갔다고 생각하니, 뽑아내면서도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푸석푸석 먼지 나는 가뭄밭에서 뽑아올린 잡초이건만, 촉촉한 물기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서늘하게 느껴진다. 생명의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밭이랑을 비닐로 덮고 작물을 심을 곳만 구멍을 내어 묘종을 심든 씨를 뿌리든 하면 제초에 들이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비닐 때문에 잡초가 거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말했듯, 겨울에 폐비닐 태우는 냄새에 시달리면서, 농사 짓더라도 절대 비닐을 쓰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비닐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온 여름 내 제초사역을 해도 잡초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순 없었다. 아무래도 일손을 줄이려면 다음번엔 비닐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썩는 비닐을 보급하면 좋을 텐데, 썩는 비닐은 값이 열배라서 이용하는 농가가 없는 모양이다.

구황작물들의 탁월한 생존력

새벽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농부는 게으른 농부다.
지난 봄의 가뭄은 정도가 지나쳤다. 잡초 몇 뿌리 뽑아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럴 땐 또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하시는 걸 잘 커닝해야 한다. 마을을 돌며 보니 과수원집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프링클러를 틀었고, 컨테이너집 할머니는 아예 호스를 밭에 대놓고 물을 주셨다. 옆집 할아버지네도 마찬가지고. 당장 긴 호스를 사 물을 주었다. 물을 주려면 땅 밑까지 젖어들도록 듬뿍 줘야지, 어설프게 주면 땅 표층만 젖어 있다 금세 마르면서 땅이 쩍쩍 갈라지기만 한다. 작물들이 어느새 푸릇푸릇 고개를 든다. 호스로 물 뿌리며 하늘이 내리는 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감자와 고구마를 ‘구황작물’이라고 하는데, 길러보니 이놈들은 정말 구황작물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감자의 경우 경쟁력이 탁월하다. 처음엔 잡초들과 함께 자라지만 어느새 옆으로 잎이 쭉쭉 퍼져 다른 잡초들을 덮어버린다. ‘일조권’을 크게 침해당한 잡초들은 말라죽지는 않지만 감자의 키를 넘어서지 못한다. 구황작물로서 탁월한 생존능력과 경쟁력을 갖췄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고구마는 5월15일 줄기를 한단 사다 심었는데, 가뭄이 절정에 이를 때여서 심자마자 시들시들 죽은 것처럼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농학박사’님들께 자문을 구했다. 그랬더니 “고구마가 말라 죽을까봐 걱정하는 게 바로 걱정거리”라는 답을 들었다. 죽은 걸로 생각해 다 뽑아버리고 새로 심을까봐 하는 말씀이었다. 과연 다 말라죽은 듯 보이던 고구마 줄기가 가뭄 끝 무렵 불사조처럼 살아나더니 다른 작물의 영토까지 침범하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마는 거름을 주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아마도 거름을 많이 주면 줄기가 너무 무성해지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처음에 로터리 칠 때 퇴비 뿌린 것 말고는 고구마에 전혀 거름을 주지 않았으나, 고구마는 너무도 무성하게 잘 자라났다.

전업 소작농이던 시절은 곧 끝이 났다. 2001년 6월20일부로 휴직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월요일 새벽 첫 고속버스로 출근해 금요일 밤차 타고 퇴근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집안 형님 한분이 초보 소작농을 이런 말로 위로해주었다. “기사 쓰러 보내긴 아까워.”

‘추수감사’의 마음을 이해하다

텃밭은 이제 조금 규모가 큰 주말농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주말에 내려가더라도 밭일만 할 순 없는 처지여서, 잡초들은 맹렬하게 밭을 장악해갔다. 비닐을 쓰지 않은 걸 또 한번 후회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7월 중순이 되자 감자 잎새가 시들어가는 기운을 보였다. 열매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갈 때 잎새는 시들기 시작하는 게 식물나라의 섭리인 모양이다. 더이상 잎새를 무성하게 하는 데 정신을 팔지 않고 열매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는 갸륵한 뜻이 전해진다. 식물조차 제 갈길을 안다.

처음 호미를 들어 감자를 캤을 때, 진정으로 누구에겐가 감사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감자 심고 물 좀 뿌리고 김 몇번 맨 것밖에 없는데, 이 뽀얗고 해맑은 실과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흙속에서 감자는 무얼 빨아들여 이렇게 탐스런 열매를 만들어낸 걸까. 옛사람들이 겨레마다 ‘추수감사제’를 만들어낸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지신명이든 저 푸르른 하늘이든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칠십 평생 농사일만 해온 할아버지에게서 왜 그렇게 감동스런 얘기가 툭툭 나오는 건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자는 여덟 이랑을 심었는데, 한 주일에 한 고랑씩 캐니 노동강도가 부담이 없었다. 나중엔 거름되라고 밭에 그냥 내버려두었지만, 처음엔 눈물방울보다 조금 큰 정도의 감자 알갱이도 버리지 못하고 바구니에 담았다. 융통성 없는 남편에 대해 직언을 아끼지 않는 ‘정론직필’형인 아내도 농작물에 대한 남편의 이 부질없는 애착만큼은 ‘농심’이려니 하고 핀잔을 주지 않았다.

감자를 대충 세 가지 사이즈로 구분해 큰 것은 쪄먹거나 요리에 쓰고, 중간 사이즈는 껍질 채 찐 뒤 까먹거나, 껍질을 벗겨 버터구이를 해서 먹으면 별미다. 찐 감자가 뜨거울 때 치즈를 얹어 녹아내리도록 해 먹는 ‘치즈감자’도 우리 가족이 지금껏 즐기는 간편한 감자요리다. 돼지감자처럼 작은 사이즈는 껍질 채 간장에 졸여 먹으면 된다.

우거진 잡초 사이로 주먹만한 감자알이…

일주일에 한 고랑씩 감자를 캐는 동안, 텃밭은 잡초들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했다. 한번은 감자를 열심히 캐고 있는데, 지나가던 이웃 할머니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거 풀밭에서 웬 감자가 다 나오우?” 아무래도 풀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우거진 잡초 밑동에서 주먹만한 감자알이 툭툭 튀어나오니 얼마나 재미있으셨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게 밭이란 걸 할머니께서 모르실 리는 없고, 아마도 어찌 그리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느냐는 놀림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풀밭이라뇨? 농부가 좀 게을러서 그렇지 이거 풀밭 아니고 감자밭이에요!”

9월2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질척질척 내리던 날, 비를 맞으며 감자 캐기를 마쳤다. 여덟 고랑에서 대략 열댓 박스쯤 캐낸 듯하다. 워낙 감자가 실하고 좋아 ‘출하’를 해볼 요량으로 농협에 값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상품 1kg에 400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지난해에 비하면 두배 이상 잘 쳐주는 값이 그렇단다.

깨끗하게 ‘출하’는 단념하고, 주변에 택배비 들여 한 박스씩 안겼다. 먼저 땅주인에게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실한 놈들 골라 한 박스 보내고, 처가와 본가 부모형제들에게 한 박스씩 부치니 대충 물량이 소화가 됐다.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에게도 한 봉지씩 챙겨주고, 회사 출근하는 길에 한 봉지씩 들고 가 감자를 좋아할 법한 선배들 몇몇에게도 안겨주었다. 그랬는데도 아직 한 세 박스 정도는 남아 있다. 고구마는 주식으로 삼기 어렵지만, 감자는 주식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 이 정도면 내년 보릿고개 때까지 한 가족이 버티는 데는 충분할 듯하다.

감자를 다 캐고나니 이번엔 고구마 잎새가 노랗게 마르면서 이제 걷어들일 때가 됐음을 알려준다. 그새 더 웃자란 잡초밭에서 3주에 걸쳐 고구마를 캤다. 당장 풀섶 어디선가 그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 “이번엔 풀밭에서 고구마가 나오우?” 할까봐 손길이 바쁘다.

고구마 줄기를 적당히 잘라주었어야 했음에도 게으른 소작농이 그렇지 못해서 고구마 농사는 스스로 볼 때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줄기를 적당히 잘라주어야 고구마가 고루 굵어지는데, 줄기를 마냥 뻗어나가도록 내팽개쳐 놓으면 먼저 굵어지기 시작한 고구마 하나만 왕창 굵어지고 나머지는 손가락만하게 자라다 만다. 감자 캘 때 눈물방울만한 것도 포기하지 못했듯, 이번엔 이런 ‘손가락 고구마’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좀 굵은 놈들만 몇개 추려서 물에 씻은 뒤 껍질째 날것으로 먹어보았더니 그것도 별미였다. 맥주 안주로는 그만이다.

고구마 수확을 마치던 날, 마지막 줄기에서 고구마를 캐낸 뒤 황급히 손수레에 싣고 밭을 빠져나오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할머니가 먼발치에서 날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계신 게 아닌가! 다 들켰구나. 나도 그냥 멋쩍게 웃을 수밖에.

지난해의 마지막 수확은 박과 늙은 호박이었다. 박은 내가 심은 게 아니었다. 잡초 사이에 예사롭지 않은 싹이 하나 자라기에 그걸 옮겨 심어봤더니 박이었다. 하얀 박꽃이 여름 내내 아름다웠음은 물론이려니와, 잘 익은 박 두 덩어리를 거둬들여 박을 탔더니 흥보네처럼 금은보화는 쏟아져나오지 않았지만 질박하고 아름다운 바가지 네개를 얻었다.

초보 소작농의 두가지 반성

호박은 거름을 가장 '밝히는' 농작물이다. 일곱달 묵은 늙은 호박을 올해 마지막으로 거둬들였다.
양대, 완두콩, 옥수수, 박, 해바라기 등 다음해에도 뿌릴 수 있는 씨앗들은 봉지에 담아 책꽂이 한 귀퉁이에 책과 나란히 꽂아두었다. 생명이 꽂혀 있는 도서관. 농부의 서가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할 것 같다. 호박, 고구마, 고추, 토마토, 가지, 깻잎, 참외 등은 싹틔우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묘종을 사다 심는 게 낫다. 감자는 씨감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걸 사서 눈을 따야 한다. 상추, 파, 얼갈이, 무, 배추는 씨를 뿌리면 된다.

초보 소작농으로서 한해를 마치면서 스스로 두 가지 정도를 반성했다. 먼저 경험이 부족해 참외, 상추, 파, 찰옥수수를 제대로 가꿔내지 못한 것. 이 지면에 상세히 쓸 성격은 아니지만, 다음엔 잘 길러낼 자신이 조금 생긴 것 같다. 두 번째는 퇴비를 틈틈이 만들어두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 농약 안 쓰고 화학비료 안 쓰려면 퇴비를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

을지로 입구나 서울역 등 도심 한가운데서 늦은 시간에 지하철 타기 위해 역에 들어서면, 자리를 펴기 시작하는 노숙자들의 군상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럴 때마다 왜 꼭 도시에 다 몰려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원도뿐 아니라 지방 어디든 빈집은 날로 늘어가고 묵밭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꼭 도시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버리면, 노숙하지 않고 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말만큼 쉬운 건 아니다. 농사일의 사이클이란 기본적으로 1년이다. 4월에 심은 감자를 7월에 수확하니 짧게 잡더라도 넉달은 버텨야 최소한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진다. 물론 자녀교육 등의 비용을 대려면 농사일만 가지고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가령 1kg당 400원 하는 감자 팔아서 자녀 대학 학자금을 마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실험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아마도 먹고사는 것 이상을 농촌에서 해결하려면 특용작물 등 환금성이 높은 작물쪽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

도시적 화려함과 도시생활의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있다면, 그걸 보상해줄 수 있는 시골의 매력은 충분하다. 나는 아마도 남은 삶의 더 많은 부분을 도회지 대신 시골에서 보낼 것 같다. 짧은 소작농 체험이 내게 준 교훈이자 결론은 그런 것이다.

이상수 기자/ 한겨레 문화부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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