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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무리 되물어도 이 길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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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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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아닌 사람으로 첫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한 오태양씨

사진/ 조계사에서 불공을 드리는 오태양씨. 자신의 실천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이 널리 알려지기를 기원한다.(박승화 기자)
여호와의 증인? 아니다. 국가에 대한 들끓는 적개심? 글쎄. 그런데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결심했다면? 스물일곱의 청년 오태양씨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결심했다. 입대 날짜를 사흘 앞둔 12월14일 정오. 겨울바람이 차가운 서울 종로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얼굴도 익힐 겸 밥부터 먹자고 제안했다.

“원래 금요일 점심은 굶습니다.”

“사랑하기에 거부합니다”


벌써 5년째다. 그는 97년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시작하면서 금요일 점심은 굶기 시작했다. 한끼 식사비를 모아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을 돕는 데 내기 위해서다. 물론 밥 굶는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자신과의 약속’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은 해결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북녘의 식량난은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여전히 이 지구촌에는 12억명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대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마음 아파하고,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그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점심 대신 생수 한병을 사들고 종로 뒷골목의 인터뷰 장소로 접어들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결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침묵. 마음속의 울림은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듯했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한번 물었다. “설명하기 어려워요?”

“음…. 그건 ‘사랑하는 이유’와 비슷한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은 ‘폭력을 싫어해서’라기보다는 ‘평화에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평화에의 끌림’이 이유의 전부라면 전부인 거죠.”

이렇게 스물일곱 청년의 ‘불경스러운 고백’은 시작되었다. 도통 자기 자신에게 결백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청년 오태양은 광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할 만큼 ‘모범생’이었던 그의 삶은 대학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94년 서울교대에 입학한 오태양씨는 학기 초 문학동아리를 찾았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청년은 박노해를 읽고, 김남주를 외우며 세상에 눈떠갔다. 3학년 때는 문학동아리 대표를 맡기도 했다.

밖으로 향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은 97년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누군가를 도우면서도 이처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돌이킨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다. 불교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같이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하던 불교인들을 통해서였다. 2년 전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계를 받으며 불자의 길로 들어섰다. 부처의 자비심과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감동받은 그는 이들을 따르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핵심은 대안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희생을 무릅쓰고 다른 삶의 대안을 실천함으로써 타인의 감동을 끌어내는 겁니다. 감동이 이어지면 사회가 바뀌는 거고요. 양심적 병역거부도 그 실천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단을 내리기 까지…

사진/ 장애인 공동체 '시골교회' 에서 봉사활동하는 모습. 그는 사회 참여를 통해 자신이 변하고 자신의 변화를 통해 세상이 바뀌기를 꿈꾼다.
99년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평화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편으로 곧 입대해 총을 들어야 하는 현실은 그의 마음 한구석을 늘 무겁게 했다. 가급적 총을 드는 기간을 줄이는 방편으로 병역특례 시험을 준비했다. 입대를 연기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지난 봄, 그의 주체할 수 없는 끌림은 시작되었다.

그는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알게 되던 날을 잊지 못한다. 날짜도 또렷하다. 2월15일 오후. 우연히 ‘인터넷 한겨레’의 토론방에 들어갔다. ‘국방의 의무 vs 종교의 자유’라는 주제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병역특례 시험을 준비하던 터라 관심이 기울었다. <한겨레21>의 기사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를 비롯해 숱한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정신없이 글들을 읽어 갔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기가 마음을 때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단지 ‘그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고, 그 자신의 실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하루 동안 밥 먹는 것도 잊고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뒤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각 끝에 대학 시절부터 가졌던 군대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과도한 선배 노릇을 자처하는 복학생 선배들이 싫었고, 캠퍼스에 만연한 군사문화도 불만이었다. 그는 “지난날을 생각하며,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괴롭히던 것의 실체를 자각하게 됐다”고 돌이킨다. 꿈틀거리던 그 무엇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병역특례 시험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그러나 도통 시험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침 한 불교사회단체에서 진행하는 ‘8일 출가 프로그램’ 소식을 듣게 되었다. 8일 동안 석가모니의 일생을 배우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출가 프로그램에 꼭 참가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고민하고 싶었다. 그러나 병역특례 시험과 날짜가 겹쳐 선택을 해야 했다. 고민 끝에 출가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예불을 드리고 명상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어떤 의미인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7일째 되던 날 아침,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행사해온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참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예불이 끝나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침내 결심이 섰다. 그는 “그날 이후 어떤 형태로든 총을 들지 않을 것임을 발심하게 되었다”고 돌이킨다. 8일 동안의 출가 프로그램을 마치며 부처님의 가르침인 5계에 따라 살겠다고 서약했다. 그날 이후 그는 5계가 적힌 서약서를 항상 지니고 다닌다. 가방에서 꺼내 보내준 5계 서약서에는 “살행하지 말라”는 계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살행하지 말라함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뜻이기에 폭력, 살인, 사형, 전쟁, 공해, 핵무기 등을 반대함으로써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애호하겠습니다”라는 풀이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 귀절들은 검은 활자에서 그의 삶으로 바뀌고 있다.

어머니를 위해 1만배 드리겠다

불심에서 우러나온 양심의 결단이지만, 오씨는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다른 불자들과 승려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내 양심이 우월하다고 내세우는 것도, 옳고 그름의 시비분별을 가리자는 것도 아니”라면서 “단지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독립을 위해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맞선 티베트불교의 전통을 따르고자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출가 프로그램을 마치며 결심이 섰다고 생각했지만, 그뒤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혹시 소영웅주의 아닌가?’ ‘군대에 가는 공포를 병역거부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냐?’ ‘과연 내가 양심을 내세울 만큼 떳떳한 삶을 살아왔는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 지난 날을 성찰하게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맞서 아무리 되물어도 도저히 총을 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내면의 울림이고, 삶의 진실임이 점점 확연해졌다. 두달여를 혼자 고민하다가 5월 중순,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격려해주었다. 큰 힘이 되었다.

아직 남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아무런 두려움도 없지만, 딱 한 사람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고 쓸쓸히 되뇌인다. 반평생 노점상을 하며 3대 독자 외아들을 홀로 키워낸 어머니다. 어머니에게는 차마 병역거부 결심을 말씀드리지 못한 상태다.

인터뷰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이 떠나지 않는 듯했다. 담담하던 그의 눈매도 어머니를 얘기하는 순간 조금 흔들렸다. 오후 2시쯤. 예정된 사진 촬영을 위해 종로구의 조계사로 향했다. 사찰 앞 마당에는 불탑이 서 있었고, 그 앞에 향이 마련돼 있었다. 그는 향에 불을 붙인 뒤 “어머니를 위해 3배를 드려야겠다”며 불탑 앞으로 다가섰다.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의 옆모습에 얼핏 회한이 스쳤다. 조계사를 돌아나오며 “구속되기 전까지 어머니를 위해 1만배를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마주 앉은 오씨는 “애당초 병역거부를 공개하고 사회화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털어놓는다. 지난 5월 주변 사람들에게 병역거부 의사를 밝힐 때만 해도 조용히 입대해서 집총거부를 할 생각이었다. 수형생활을 마친 뒤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뛰어드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지난 8월, 인터넷을 통해 본 한 40대 여호와의 증인의 수기, ‘잊혀질 수 없는 기억에 대한 조사’는 그를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으로 이끌었다. 그 글에는 20대 초반부터 3번에 걸쳐 7년10개월의 징역을 감내한 한 인간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나 처참했다. 그 수기를 읽고 온 몸으로 흐느꼈다는 오태양씨는 이렇게 뼈아픈 고통을 좀더 알리기 위해 ‘공개적인 병역거부 선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섯 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 끝에, 종로의 한 식당을 찾았다. 어느새 날은 어둑해졌고, 시계는 저녁 6시를 향하고 있었다. 오씨는 식당에 들어서며 “오늘 밥 처음 먹네…”라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아침도 걸렀느냐?”고 묻자 “얼마 전부터는 아침을 안 먹는다”고 답한다. 11월 중순, 아프가니스탄에 식량지원이 안 돼 5백만명의 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뒤로는 아침도 거른다는 것이다. 밥값을 모아 아프간 난민을 돕는 데 보내고 싶어서다. 오씨는 “큰돈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이어 그는 “아프간 전쟁에서 보듯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며 “양심적 병역거부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평화적 실천”이라고 밝힌다.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그가 잊었다는 듯 식당 아주머니에게 외친다.

어둠 속에서 외쳐야 할 나날들

사진/ 12월11일 서울대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 최근 들어 잇따라 법학계와 시민단체 주최의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김종수 기자)
“비빔밥 하나는 계란 빼고 주세요.”

지난 3월 ‘8일 출가 프로그램’을 다녀온 뒤로는 채식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도 생명을 훼손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말이 오고가는 동안 상이 차려졌다. 비빔밥에 된장찌개가 나왔다. 그는 좋아한다는 된장찌개 속의 두부를 듬뿍 넣어 비비며 “대체봉사로 오지학교 선생님을 해도 참 좋을 텐데…”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교대를 졸업한 그에게 가장 적합한 대체봉사다. 밥을 비비다 말고 그는 “노숙자를 돌보는 일도 좋고 쓰레기 청소도 좋아요. 뭐든 총을 드는 일이 아니면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스물일곱 청년의 가슴속에는 살생불계의 원칙을 지키려는 종교적 양심, 밥을 나눈 북녘 동포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민족적 양심,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겠다는 평화적 양심이 함께 어울려 있다. 오씨의 경우처럼 어쩌면 양심이란 종교, 이념, 사상에 따라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평화에 대한 끌림을 숨기지 못하는 한 청년은 ‘공개적’ 병역거부 선언자로서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에는 따라갈 발자욱도, 방향을 알려줄 표지판도 없다. 어둠 속에서 한 젊은 청년은 세상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있다. “나에게 총과 계급장 대신 봉사의 기회를 달라”고. 그의 뒷모습이 사라져가는 골목길은 어느새 캄캄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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