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등록 : 2001-12-19 00:00 수정 :
아시아 각 나라의 10대 뉴스를 기획하면서 우리 것도 챙겨볼까 하다가 관뒀습니다. ‘아시아네트워크’를 통해 이웃한 나라들을 한번 살펴보는 것은 좋지만, 우리의 지난 1년을 되새겨 새로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솔직한 마음은, 이들 나라 못지않은 사건·사고 일지가 줄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인 몇몇 ‘게이트’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뉴스 보기 겁난다는 글이 신문에 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1년 사이에 만신창이가 되고 퇴보만 했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권력형 비리에다가 남북관계의 퇴조라는 궂은일도 있는 반면 의미있는 진전도 이뤄졌습니다. 물의 흐름으로 본다면 사건·사고는 물결입니다. 뉴스는 여기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찰랑이는 물결 아래 물밑의 도도한 흐름도 있습니다.
강물 같은 2001년의 흐름은, 권력에 대한 전반적인 감시와 견제가 강화된 것, 달리 말해 여러 부문에서 성역깨기가 이뤄진 것입니다.
부산 기장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이 군청 직원에게 강압적인 발언을 했다가 사과를 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것은 그런 사례입니다. 국회 앞 여당 행사에 구청 직원들이 주차위반 스티커를 온통 갖다붙인 것도 같은 일입니다. 국회의원의 목에 방울을 건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감시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몫이었습니다. 그 감시에 시민, 노조, 하위직 공무원 등이 나서고, 감시기관까지 매섭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언론 세무조사는 비록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권력끼리 봐주기의 묵계를 깼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계기로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거침없이 할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큰 변화입니다.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도 같은 맥락입니다. 시민들이 야당에 견제의 힘을 주었습니다. 대통령의 목에 방울을 달고, 검찰권의 중립과 공정한 선거관리를 이뤄낼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권력형 비리가 밥맛을 잃게 하지만 그것이 묻히지 않고 터지는 것도 그만큼 감시기제가 작동하고, 투명화·민주화의 지수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태양씨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도 이런 흐름 속에서 나왔고 그 흐름에 힘을 보탤 것입니다. 신앙이 아닌 양심을 내세워 처음으로 총을 거부한 오씨의 행위는 ‘신성한 의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씌워진 제도와 의식에 대한 성역깨기입니다.
시민사회는 정당한 항거를 두려움이나 후환없이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직도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고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처 또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곧은소리가 개개인에게 가능의 영역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이 큰 진전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여전히 대단한 성역입니다. 한국 정부, 특히 국방부가 “이것만큼은 안 돼”라며 온몸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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