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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긍심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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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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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8일치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다니는 ‘민족학교’가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학교는 해방 뒤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주로 담당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 학교다. 신문에 의하면 일본 전역에 있는 총련계 학교의 토지와 건물을 담보로 모두 194억엔의 융자한도가 설정돼 있고, 그 가운데 약 88억엔은 총련계 은행인 조은신용조합이 채권자로 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각지의 조은신용조합은 파탄했고, 각 신용조합의 금융정리 관재인은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하는 예금보험기구나 정리회수기구와 제휴해 담보물건인 일본 각지의 민족학교를 처분해 채권을 회수하는 일을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민족학교가 경매돼 없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민족교육, 그 탄압의 역사

해방 뒤 일본에서 재일동포 1세는 무엇보다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고, 거의 자력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양성하고 교육사업을 수행해왔다. 민족학교는 피와 땀의 결정이며 재일동포의 생명 그 자체다. 현재 일본에는 한국계 학교가 4곳, 총련계 학교 80곳이 있다. 총련계 학교는 유치원, 초·중·고, 대학교 등이 있고 약 1만5천명이 다니고 있다. 여기서 명백해지듯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은 북한계 총련이 경영했다. 이전에는 백수십여개 학교가 있었다 한다.


거품경제 붕괴 뒤 땅값 하락으로 일본의 유명한 큰 은행이나 대기업도 도산 위기를 맞고 있다. 재일동포 기업도 비슷한 처지다. 특히 금융기관의 경우 부실경영까지 겹치면서 민단계나 총련계 모두 도산상황이 됐다. 총련계는 재정난을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각지 민족학교를 담보로 거액의 자금을 대출했고, 그것이 이제 일본 정부의 은행채권 정리정책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은 식민지 본국이었던 일본 땅에서 피억압 민족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가르쳐온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서 민족교육은 단순한 교육문제가 아니다. 그곳에는 지배집단과 피지배 집단 사이에 차별과 편견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있을 뿐 아니라, 남북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민족교육은 본래 국민국가가 책임을 지는 공교육이다. 하지만 재일동포의 민족학교는 거의 재일동포들의 노력으로 완성돼왔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정부는 남북대립 속에서 항상 총련계 민족교육을 적대시했다. 일본 정부와 협력하거나 일본 정부를 꼬드겨 탄압을 가했다. 1966년, 67년, 68년 잇따라 일본 정부가 국회에 상정했던 ‘외국인학교법안’은 한국 정부의 사주로 민족학교를 폐지하려는 의도로 추진됐다.

한국 정부와 결탁한 일본 정부의 이런 시도는 일제치하 민족의식 말살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북한에 대한 증오심이 민족교육 탄압이라는 반민족적 행위에 중첩돼 있었다. 다행히 외국인학교법안은 양심적인 일본인의 집요한 투쟁으로 저지됐다. 물론 총련의 민족교육이 북한의 국민교육으로 성립돼온 이상 체제 이데올로기 중심의 교육내용 등 많은 문제가 있는 게 명백하다. 그러나 이 정도 대규모의 자주적 민족교육이 옛 식민지 본산에서 반세기 이상 계속돼온 것은 세계 교육사에 특필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한 시대를 산 ‘민족공동체’의 총재산이다.

최근 몇년 일본동포들 사이에는 북한체제 이데올로기나 교육내용에 예속된 민족교육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됐다. 또 민족학교의 재정적 기반약화, 조은신용조합에 의한 저당권 설정 등의 문제가 얽히면서 자주적 민족교육을 추진하려는 운동도 전개돼왔다. 이런 운동은 한국에서 통일교육이나 평화교육을 추진하는 시민운동과 충분히 제휴할 여지가 있다.

한국정부의 협력을 바란다

총련계 민족교육 문제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그것을 담당해온 교사나 학부모의 의향을 존중하는 것이다.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을 지키고 지원하는 일이 한국의 체제 이데올로기나 교육내용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재일동포의 자주적 교육사업을 지키고 지원한다는 원칙을 관철할 필요가 있다. 이런 민족교육 문제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보다 훨씬 중요하다. 금강산 관광사업이나 민단계 은행의 재편을 위한 투자도 중요하지만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한 정책 추진도 상당히 중요하다. 과거 범해온 과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남북공동성명’에서 주창한 화해와 협력의 정신을 관철해야할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나 민족에 국한된 교육은 극복돼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지배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남북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일동포 자녀들은 지금도 ‘민족’이라는 회로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없다.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을 지키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대 교수·서울대 초빙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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