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성폭행 수사, 어른들의 법논리에 의해 끔찍한 악몽을 되새겨야 하는가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경찰수사, 똑같은 내용을 다시 진술해야 하는 검찰수사, 급기야는 법정에서 증언해야 하는 고통.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그 피해자가 어린이라면?
“설사 재판에서 지더라도…”
지난달 13일 수원지법 앞에서는 지나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자들은 용인시 구성면 ㄷ아파트 주민들.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아이를 법정에 세우나”, “더이상의 증거는 필요없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마을 놀이방 운영자인 양아무개(63)씨가 놀이방에 다니던 꽃님이(가명·4)를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혐의가 알려지자 주민들은 즉각 대책위를 꾸렸다. 사건 발생 6개월 만에 양씨는 구속기소됐으나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있어 유일한 ‘증언자’인 꽃님이가 법정에 나서야 할 형편이 됐다. 성범죄처벌을 위한 주민대책위 박영순 대표는 “어른들의 법논리를 위해 아이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상처를 깊이 각인시키는 위험한 처사”라고 우려했다.
몇달간 소아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던 꽃님이는 현재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꽃님이 아버지 최아무개(43)씨는 “설사 재판에서 지더라도 당시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 아이에게 그 일을 또 말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꽃님이의 부모와 주민들은 경찰·검찰의 수사기록과 비디오 녹화를 해놓은 소아정신과 치료내용을 판단의 근거로 채택해줄 것을 법정에 호소하고 있다. 흔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네번 운다고 이야기한다. 피해를 당할 때 한번, 주변의 질시 때문에 또 한번,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법정에서 운다. 성폭력 자체로 겪는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사회와 제도가 씌운 이중 삼중의 편견에 시달리다보면 피해자는 만신창이가 돼버린다.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낮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폭행의 경우 신고율은 발생율의 6% 안팎으로 추산되나(2000,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전체 성범죄의 15∼30%에 달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은 신고율이 2% 안팎으로 떨어진다. 주민들에 따르면 용인 ㄷ아파트 인근에는 꽃님이말고도 여러 피해 어린이들이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남자아이는 몇 차례 돈을 받고 항문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사기관에 신고한 경우는 꽃님이 하나다. 수사와 재판과정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지난 9월 인터넷에 공개돼 네티즌들을 발칵 뒤집었던 전남 무안의 유치원 사무장 성폭력 사건 역시 현재 법정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현지(가명·4)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다 엄마에게 “쉬야가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사무장 아저씨가 현지 쉬야를 손으로 만지고 머리카락이 달린 고추를 입 안에 넣었다는 것이 아이의 증언이었다. 담당판사가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한 결과 현지는 현재 사건 후유증으로 심각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이상 그 일을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12월7일에 진행된 비공개 심리에서 현지는 또다시 증언을 해야 했다. 재판 과정상 어쩔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판사와 검사, 수사계장, 가해자쪽 변호사, 비디오 녹화자 등이 빙 둘러선 가운데 현지는 배석한 여성판사를 상대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현지 엄마 송아무개(26)씨는 “낯선 남자 어른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가 몹시 히스테릭해졌다”고 아이의 상태를 전했다. 현지의 이야기는 오락가락했지만 가해자가 누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고통 덧나게 하는 수사과정
영유아 아동은 육하원칙에 따른 일관된 진술을 하기 어려운 탓에 많은 사건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무혐의 처리되곤 한다. 10월에 발족한 아동학대근절을위한가족모임(이하 가족모임·02-546-6779) 송영옥 대표는 “현재 16건의 사건이 계류돼 있는데 어떤 수사관과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진행과정이 천차만별”이라며 “피해를 당한 아이에게 어른에게 하듯이 날짜와 시간을 기억해내라, 목격자를 떠올려봐라, 몇번이나 당했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고 나아가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삼는 것은 위험천만한 제도의 폭력이자 정신적인 학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터무니없이 긴 수사기간과 가해자와의 대질심문 등도 아이의 고통을 덧나게 한다. 송 대표의 딸은 유치원 이사장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당한 사실이 인정돼 지난 5월 민사재판에서 6천만원의 배상판결을 받았다. 검찰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조차 하지 않은 사건을 민사재판정이 뒤집은, 보기 드문 경우였다. 송씨는 3년간 끌었던 딸아이의 법정다툼 과정에서 다른 피해자들을 만났다. 자구차원에서 의료문제나 법률문제를 서로 돕다가 지금의 가족모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송씨가 겪었던 것은 악몽 그 자체였다. 1년이 넘도록 치료를 받았던 아이는 잊을 만하면 수사기관에 불려다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인 송씨는 생업을 포기해야 했고, 부부간의 불화도 잦아져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됐다. 용인의 꽃님이 부모는 경찰수사가 진행되던 두달간, 그리고 검찰로 넘어가고도 석달간 아이를 밖에 내보내지 못했다. 세탁소를 하는 부모가 잠깐 눈길을 놓친 사이 아이가 길에서 ‘원장 할아버지’를 만나고 온 날에는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아이가 오줌을 줄줄 싸면서 세탁소 다리미를 들고 “할아버지 얼굴에 피가 나게 때려주라”고 거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꽃님이의 부모와 주민대책위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경찰수사, 검찰수사를 합치거나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각계에 호소하기도 했다.
가족모임에서 돕고 있는 서울 민영이(가명·7) 사건의 경우 검찰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질시켜 문제가 되고 있다. 민영이가 자신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다고 지목한 이는 다니던 미술학원 원장의 남편. 수사기간 내내 비교적 또렷하게 진술했던 민영이는 수사실 복도에서 원장의 남편과 맞닥뜨리자마자 새파랗게 질려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이들의 특성 배려하는 수사기법을
한국 여성의전화연합은 11월27일 ‘검찰수사상 성폭력 피해자 인권보장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조옥 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상담부장은 어린이와 장애여성에 대한 수사는 보호·치유 과정과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정신지체장애인과 영유아 피해자의 경우 진술강요를 받으면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착각해 아예 입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의 특성을 배려하는 수사기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 부장은 그 방법의 하나로 ‘일방통행거울’을 들었다. 훈련된 수사관이나 전문가가 피해자를 대하는 동안 다른 관계자들은 밖에서 지켜보면서 아이가 모르게 질문내용을 전하는 방식이다. 수사와 병행할 수 있는 치료방법으로는 놀이치료가 있다. 국내 몇 군데의 소아정신과 병원에서 시행하는 이 방법은 전문가가 아이와 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이다. 이를 초동수사과정에 포함시켜 비디오로 녹화해놓는다면 진술을 반복해서 하지 않아도 되고, 나중에 법정에서도 유효한 증거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피해자 부모들은 △전담수사기관 확대 △치료센터 설립 △수사관 교육을 가장 절실한 과제로 꼽았다.
상처가 잘 아무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특히 초기진료와 증거수집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원에서 법정에 불려다니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진찰을 기피해 피해자 부모들이 아이를 들쳐업고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다. 여성부 주도로 10월 중순 경찰병원을 비롯해 수도권에 5군데의 여성폭력 긴급의료지원센터 문을 열었지만 전국적인 발생 규모에 비춰볼 때 터무니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경찰청은 최근 파출소부터 지역 비정부기구(NGO)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여성·아동 도우미> 책자를 발간했다. 경찰청 여성실 이금형 실장은 “조만간 아동 성폭력 피해자 수사지침서를 마련해 교육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검찰이다. 가족모임과 여성단체들이 대책마련을 촉구했지만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실에서는 “수사절차의 문제는 형사소송법 자체를 뜯어고치는 문제라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참다 못한 피해자 부모들과 여성단체들은 집단행동에 나설 준비를 하는 중이다. 내년 1월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아동성폭력에 대한 특단의 수사조처와 입법청원을 위한 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는 두렵다. 아이가 자라는 게 두렵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와 이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폭력을 다스려야 할 수사기관과 법의 직무유기를 알게 되면 또 어떤 마음을 가질까.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아이에겐 정말 아무 일 없냐고. 아무 일 없으리라 확신하냐고.” 가족모임 송 대표의 독백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몇달간 소아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던 꽃님이는 현재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꽃님이 아버지 최아무개(43)씨는 “설사 재판에서 지더라도 당시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 아이에게 그 일을 또 말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꽃님이의 부모와 주민들은 경찰·검찰의 수사기록과 비디오 녹화를 해놓은 소아정신과 치료내용을 판단의 근거로 채택해줄 것을 법정에 호소하고 있다. 흔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네번 운다고 이야기한다. 피해를 당할 때 한번, 주변의 질시 때문에 또 한번,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법정에서 운다. 성폭력 자체로 겪는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사회와 제도가 씌운 이중 삼중의 편견에 시달리다보면 피해자는 만신창이가 돼버린다.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낮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폭행의 경우 신고율은 발생율의 6% 안팎으로 추산되나(2000,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전체 성범죄의 15∼30%에 달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은 신고율이 2% 안팎으로 떨어진다. 주민들에 따르면 용인 ㄷ아파트 인근에는 꽃님이말고도 여러 피해 어린이들이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남자아이는 몇 차례 돈을 받고 항문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사기관에 신고한 경우는 꽃님이 하나다. 수사와 재판과정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지난 9월 인터넷에 공개돼 네티즌들을 발칵 뒤집었던 전남 무안의 유치원 사무장 성폭력 사건 역시 현재 법정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현지(가명·4)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다 엄마에게 “쉬야가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사무장 아저씨가 현지 쉬야를 손으로 만지고 머리카락이 달린 고추를 입 안에 넣었다는 것이 아이의 증언이었다. 담당판사가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한 결과 현지는 현재 사건 후유증으로 심각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이상 그 일을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12월7일에 진행된 비공개 심리에서 현지는 또다시 증언을 해야 했다. 재판 과정상 어쩔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판사와 검사, 수사계장, 가해자쪽 변호사, 비디오 녹화자 등이 빙 둘러선 가운데 현지는 배석한 여성판사를 상대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현지 엄마 송아무개(26)씨는 “낯선 남자 어른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가 몹시 히스테릭해졌다”고 아이의 상태를 전했다. 현지의 이야기는 오락가락했지만 가해자가 누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고통 덧나게 하는 수사과정

사진/ "아이에게 그 일을 또 말하게 할 수는 없다." 11월13일 수원지법 앞에서 열린 용인시 ㄷ아파트 주민들의 시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