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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 충청도 농사꾼이 팔뚝질하게 된 사연

위액 쏟으며 일주일 연대단식한 에세이스트 김현진의 콜트-콜텍 9년의 싸움 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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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08 11:54 수정 : 2015-12-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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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11월 22일부터 11월 28일까지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 있는 콜트-콜텍 노숙 무기한 단식 현장에서 함께 단식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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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 물려줍니다. (표준새번역, 시편 17:4)

콜트-콜텍 악기의 박영호 사장은 직원 훈시를 할 때마다 그런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나는 이미 나이 30대에 자손의 자손까지 다 먹을 것을 다 벌어 놓았다. ” 그에게 그런 부를 일구는 데 수단이 된 콜트-콜텍의 직원들은 최저임금보다 10~20원 높은 월급을 받았다. 기본급은 100만원이 조금 넘었다. 특근과 시간외 근무를 해야 한 가정이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이었다. 2004년 이미 국내 120대 재벌 목록에 입성한 박영호 사장은 어느 망년회 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한다. “나는 돈이 너무 많아서 써도 써도 줄어들질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 이렇게 돈이 쌓이고 쌓여도 쓸 데가 없는 사람이 요즘 회사가 어렵다고 엄살을 떨자 직원들은 돈도 받지 않고 시간외 근무를 자청하기로 했다. 그가 쌓아 놓은 돈을 쓸 곳은 많았다.

이를테면 작업용 마스크나 목장갑 같은 게 그랬다. 기타의 몸체가 되는 목재를 다루는 곳인 만큼 ‘빼빠질’을 하느라 공장 사방이 나무 먼지로 보얗게 되었다. 하루에 마스크와 장갑을 1개씩 지급해야 했지만 직원들에게는 1주일에 단 한 개씩만이 주어졌다. “빨아 써라. ” 기관지에 문제가 생긴 직원들이 늘어났지만 직접적으로 원인이 공장에 있다고 증명할 시간도 방도도 없어 개인의 질병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작업 중 직접적으로 사고를 당한 엄연한 산재 처리의 경우에도 회사는 노동부 등에 보고되었을 경우 회사에 돌아올 불이익을 염려하여 개인적으로 치료를 받고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했다. 그렇게 제출된 영수증은 결제 라인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어디서 다시 '빠꾸' 먹고, 처리되는 게 하세월이었다. 뿔이 난 어떤 직원들은 차라리 내 돈으로 내고 만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하며 병원비를 보상받는 것을 포기해 버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절반에 가까웠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장을 비롯한 관리자들이 지나가면서 엉덩이를 툭툭 치는 것 정도는 아주 가벼운 정도에 해당하는 작업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호봉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외 근무 수당 이외에는 어떠한 수당도 지급되지 않았고, 자녀 학자금 지원은 그리 큰 돈이 들지 않는 고교 때까지만이었다. 제대로 된 임금 협상이 이루어진 적은 물론 없었고, 누가 얼마를 받을지는 전적으로 사측에서 보낸 공장장에게 전권이 위임되었다. 그에게 잘 보이느냐 눈 밖에 나느냐에 따라 누가 얼마를 받을지가 결정되었다. 노동조합 결성 후 직원들은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급여가 10년간 근속한 선배 직원의 급여보다 많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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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 악기의 경우 노동조합의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콜텍 노동조합 역사는 단 1년에 불과했다. 두 회사 역시 모두 박영호 사장의 소유이면서 자재와 거래가 희한하게 오가는 이상한 관계였다. 갑자기 두 자리 수에 해당하는 직원들이 정리해고 되었고, 연말까지 몇 명이 나가야 한다고 사표를 들이미는 바람에 콜텍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간혹 투쟁사업장의 경우 처음부터 소위 ‘의식화’된 사람들이 투입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전에 위치한 콜텍 공장에는 충청도 인근 농민들이 많았다. “시골서 농사 짓던 사람들이 20년 30년 일해서 공장 다 키워 놓으니까 말이여, 이제는 갑자기 하루 아침에 나가라는겨. ” 기타를 꼭 옛날식으로 ‘키타’라고 발음하는 50대 중반의 임재춘 조합원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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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근 콜텍 지회장도 이런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데모하는 거 보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설마 팔뚝질 같은 걸 하게 될 줄 정말 꿈도 못 꿨어. 처음엔 모든 게 너무 어색했어. ” 민주노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지만 변변한 활동을 해 보지 못했다. 2007년의 어느 주말, 사무실 집기를 모두 빼버린 사측이 공장 문을 잠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품을 하며 또 월요일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출근했던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잘 출근했던 공장이 갑자기 문을 닫고 더 나올 필요가 없다니. 그렇게 돈이 많다는 사람이, 동남아시아로 회사를 옮겨 인건비를 줄여 돈을 더 벌려는 거였다. 외제만 있는 줄 알았던 ‘먹튀 자본’이 국산도 생겨난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우량 회사가 강성 노조 때문에 다 망했다”라는 말에 조합원들이 어이가 없을 만하다. “교섭 한 번, 파업 한 번을 못해봤어. 파업 한 번을 못해 본 노조가 어떻게 강성노조야? ” 임재춘 조합원은 워낙 경력이 오래된데다 관리직이었으므로 다른 회사에 취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묻자 그는 나 한 몸 건사야 충분히 할 수 있었지, 하며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후배 노동자들은 어뜩혀. 솔직히 우리야 20년 30년 일했응게, 지금 공장에 돌아가도 아마 1-2년이면 나가야 될겨. 근데 10년 일한 후배 노동자들은 어떡하며, 우리가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다른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겄어. 그 생각으로 여직 버티고 있는 거지 뭐. ” 그래도 9년이다. 강산이 바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인근 지회장도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아무리 길어도 2-3년이면 해결될 줄 알았어. ” 처음에 시작할 때 십 년 갈 줄 알았으면 하셨겠어요, 하고 묻자 모두 손사래를 친다. “아유 미쳤남, 절대 안하지. 죽어라고 안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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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러 건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소송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가관인 판결은, 그리고 콜트-콜텍 투쟁이 수많은 노동자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띠게 된 판결은 바로 이 구절이다. “미래에 있을 경영위기에 대비한 정리해고는 적법하다. ” 뭔가 예언성을 띈, 알쏭달쏭한데다 판사가 수정구슬이라도 가지고 판결을 내렸나, 싶을 만큼 어딘가 미신적이고 민망한 이 판결이 선례로 남는다면, 대한민국에서 해고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법원이 직접 지정한 회계사로부터 특별 회계 감사를 받은 결과 “경영 상태가 우량하다”는 판정을 받은 기업이 미래에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니 미리 해고 좀 하겠다는 게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면, 사실상 직원을 해고하고자 하는 회사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다. 긴 투쟁 기간 기타를 배워 ‘콜밴’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한 조합원들은 이 희한한 판결문을 가지고 <서초동 점집>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임재춘 조합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한민국 판결은, 다 판사 맴이여, 판사 맴. ” 박영호 사장은 그 동안 재판정의 증인 요구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불출석 벌금 쯤이야, 써도 써도 남는 그 돈에서 쓰면 그만이었다. 11월 27일에 예정되어 있던 심리에는 희한하게도 박영호 사장의 동생이 출석하기로 하였으나, 그 역시 전날 불출석을 통보해 재판 일정은 다시 한 번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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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 빼고 다 해 봤다’라는 표현은 콜트-콜텍 싸움의 9년 역사에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의 단식투쟁, 경찰특공대에게 끌려 나온 본사 점거, 양화대교 인근에서의 고공 농성, 심지어 분신까지. 그나마 콜트-콜텍 사람들이 비교적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들이기도 하지만 문화연대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연대가 힘이 되어 준 것으로 보인다. 예술가들이 기타와 각종 악기를 가르쳐 주어 ‘콜밴’이 첫 무대에 섰을 때는 많은 이들이 울었다. 연기를 배워 연극 공연까지 했다. 그러면서 수없이 다른 사업장에 연대를 다녔다. 이렇게 쓰고 나니 콜트-콜텍 조합원들이 꽤나 많은 것 같지만, 지금 이들은 단 네 사람이 남았다. 그렇게 달랑 네 사람이 정말이지 별 짓을 다 하고 다닌 것이다. 조금 규모가 큰 투쟁사업장에는 기획부장, 선전부장, 뭐 이런 식으로 역할이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콜트-콜텍 사람들은 닥치면 그냥 다 한다. 물론 ‘공동행동’이라는 시민들이 이들을 돕긴 하지만, 달랑 네 명이서 10년 가까이 투쟁을 계속해 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잃은 것도 많았다. 네 사람 중 두 사람의 가정은 결국 깨어졌다. “가장이 가장 노릇을 못 하니까... ” 하고 이인근 지회장을 말을 줄이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해.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고자들에게서 빼앗아 가니까... ” 사람을 좋아해서 계모임을 여럿 하던 임재춘 조합원은 계가 왕창 깨져 돈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비슷한 또래의 자영업자 친구들에게 ‘알바’ 쓸 때 근로기준법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다가 ‘따’를 당했다. 결국 이들에겐 서로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서로 형제 같고 그러세요? 하자 입을 모아 아주 웬수 같어!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단식하던 6일째, 나는 갑자기 위액을 토한 후 상태가 아주 안 좋아졌다. 그 때 변기를 붙잡은 채로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이 취재가 끝나면 집에 가면 된다. 하지만 “김무성은 우리가 여기서 죽어 나가도 신경 안 쓸 거야. 하지만 농성장을 접을 생각은 절대로 없어. ” 라던 이들은 어쩐단 말인가. 내가 일주일간의 취재를 마친 후, 지난 14일 총궐기대회에서 금이 간 늑골 때문에 숨쉬기도 아파하던 이인근 지회장은 결국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에게서 마지막 들은 말 두 마디였다. “복직해서 1년 일하고 정년퇴직해도 좋아. 결국 우리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 그리고 다음 말은, “배고파”였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배고픈 사람. 4명 중 이제 2명이 남았다. 이것은 콜트-콜텍 사람들이 불쌍해서 한번 돌아봐주는 그런 차원의 관심이 아니다. 미래에 있을 어려움에 대비해서 얼마든지 사람을 자를 수 있게 해주는 노동개악에 대한 싸움, 바로 우리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NoCort 트위터 계정에 접속하면 시민들의 무기한 릴레이 단식에 참여할 수 있다. 네 사람이 버틴 9년의 세월에, 당신과 내가 손을 내밀 때가 왔다. 지금 당장. 내일이면 늦는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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