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었다. 지난 7월22일 전북 김제시 김제역 앞. 승용차 앞자리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맞잡았다. 따뜻했던가.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다. 그는 미안하다고도 했다. 점심때가 지나도록 식사 대접도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가 웃어 보였다. 하얀 이에 햇빛이 미끄러졌다. 눈부셨던가. 그는 치료차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은 오지 않았다.
그날 전북 임실군 덕치면의 한 농가에서 그를 만났다. 오래 앉지 못해 구들장을 지고 그는 말했다. 살아생전 그가 언론과 한 마지막 인터뷰였다. 숨이 가빠서 한 입에 두 문장을 담지 못했다. 바짝 마른 몸은 성냥불만으로도 타버릴 듯했다. 간암 말기였다. 이름처럼 형형한 눈빛에 기대어 기사 마지막에 희망을 담아도 보았다. 지인들의 간절함을 베고 누운 그는 악착같이 살고 싶다고 했으므로. “김형근은 지금 아프다. 그러나 살아 있다. 그리고 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제1072호 표지이야기 ‘나는 패킷 감청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세포의 병리를 넘지 못했다. 사람의 문장은 사실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올해 들어 가장 커다란 달이 누렇게 뜬 9월28일 새벽, 그는 눈을 감았다.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그의 육신은 화장됐다.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구묘역에 안장됐다. 발인 전날 300명 남짓 모인 지인들이 통한을 토하고 씻김굿을 하였으나, 저승길에 뒷걸음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떠난 그는 ‘통일 교사’ 김형근이다. 향년 56.
1980년 ‘오월’ 이후 능욕당한 35년의 삶
김형근의 삶은 1980년 ‘오월 광주’에 녹아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고꾸라지기 1년 전, 1978년 그는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한배에 타서는 안 될, 결코 오월동주할 수 없는 세력은 연이어 출몰했다. 그는 학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79년 12월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정권 탈취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기말고사를 보던 강의실에서 그는 체포됐다. 구타와 협박에 못 이겨 탈주한 뒤 생애 첫 수배자가 되었다. 이듬해 1980년 봄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월’이 찾아왔다. 5월17일 신군부의 공수부대가 탱크를 앞세워 대학 교정에 들어서던 순간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밖으로 뽕나무밭이 이어졌지요. 교문 밖에 나설 때 뽕나무 그림자가 선명했는데, 그것이 공수부대원인 줄 알고 한 번 엎드렸다가 살피고 나갔습니다. 뽕나무밭을 지나면 교문인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탱크와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스리쿼터가 학교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탱크가 3~4대, 군인이 300여 명 됐을까. 저하고 후배는 순간 뽕나무밭에 엎드렸습니다. 곧이어 학생회관 농성장에서 아비규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옥에서 나는 소리라고 할까요? 대검으로 머리를 비껴 찔린 여학생, 허리 부러진 학생, 보초 나갔다 맞아 죽은 학생 등등 후에 자세한 진상을 알았지만 그때는 다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총에 꽂아놓은 칼이 달빛에 반사되어 잔혹함을 드러낼 때 악마들처럼 보였습니다. 나가 싸워야 되는데 땅에 엎드린 채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소리 없는 분노의 눈물만 펑펑….”
이후 35년 김형근의 삶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능욕당한 세월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신군부가 적시한 수배자 329명에 들어 쫓겼다. 그해 9월에는 강제징집을 당했다. 고문으로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지만 신체검사는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정권은 늑대였고 시민은 먹잇감이던 시절이었다. 군복무 중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읽었다며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내처 ‘빨갱이를 푸르게 만든다’며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녹화교육에도 시달렸다. 1986년 4월에는 ‘전두환 타도 민주 쟁취’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또다시 수배를 당했다.
수배·수감 기간만 10년 국가보안법이라는 차꼬는 이후에도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3차례 제적과 복교를 거쳐 1988년 대학을 마쳤다. 졸업 뒤 전북 익산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들여 ‘황토서점’을 열었다. 1989년 12월 정권은 판금 서적을 취급했다며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4년 뒤인 1993년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압수한 서적 3천여 권은 돌려주지 않았다. 서점은 망했다. 1995년 그는 또다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됐다. 그가 쫓기고 갇힌 수배와 수감 기간을 더하면 10년을 훌쩍 넘는다. 그의 몸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재판하면 공소장이 3천 장이 넘어요. 공소장 읽고 싸워야 했죠. 결국 참담하게 이렇게 됐어요. 몸을 돌볼 틈이 없었어요.” 몸은 무너졌지만 결기는 더 오뚝해졌다. 김형근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이뤄진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을 거부했다. 2002년 외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보상이라니? 보상받을 것이 있으면 민주와 통일로 보상이 되어야지. 국민들의 보다 질 높은 삶의 보상이 되어야지. 영광은 영광을 받을 자격만이 아니라 영광의 조건이 이루어져야 받을 수 있는 거란다.” 보안법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200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전주 완산갑)에 출마하기도 했다. ‘소리만 내는 입술보다 실천하는 손발이 되겠다’는 팻말을 내걸었다. “내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어요.” 1999년 40살 나이에 가까스로 교단에 섰다. 이조차도 정권과 수구세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2006년 12월6일치 기사(‘전교조 교사, 중학생 180명 데리고 비전향 장기수들과 ‘빨치산 추모제’’)가 그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남녘통일 애국열사 추모제’에서 학생들과 전야제에 참석한 게 전부였다. 6·15 공동선언을 외우거나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른 것이 ‘과격한 친북·반미 구호 넘쳐’로 둔갑했다. 수사기관은 ‘불법 감청’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옥죄었다. 법원도 의뭉스러웠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파기환송했다. 이뿐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그는 보안법 혐의로 재판에 계류돼 있었다. 그가 결코 출석할 수 없는 재판 기일이 10월28일 오후 2시로 잡혀 있다. 죽는 날까지 보안법 혐의로 재판에 계류 지난 7월22일 김형근은 그믐처럼 말했다. 5월 초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지만 방 벽에 촘촘한 생활계획표까지 붙이고 독종처럼 살아남겠다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분단이라는 주제에 인권, 노동 다 들어 있어요. 분단 때문에 왜곡돼 있어요. 박근혜로 대표되는, 분단으로 이득 보는 사람들이 가득해요. 이들 세력과 통일을 이루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인 거예요. 시대의 짐을 자기 것으로 안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처세로, 임시변통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생전 김형근은 자신의 이름 앞에 효량(曉凉) 두 글자를 즐겨 썼다. 새벽 그리고 서늘함. 그런 계절에 그는 갔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2010년 9월 ‘남녘통일 애국열사 추모제’ 참석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됐던 김형근 교사가 전주지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위). 5년 뒤인 지난 7월 간암 투병 당시 김 교사의 초췌한 모습. 연합뉴스, 전진식 기자
수배·수감 기간만 10년 국가보안법이라는 차꼬는 이후에도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3차례 제적과 복교를 거쳐 1988년 대학을 마쳤다. 졸업 뒤 전북 익산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들여 ‘황토서점’을 열었다. 1989년 12월 정권은 판금 서적을 취급했다며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4년 뒤인 1993년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압수한 서적 3천여 권은 돌려주지 않았다. 서점은 망했다. 1995년 그는 또다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됐다. 그가 쫓기고 갇힌 수배와 수감 기간을 더하면 10년을 훌쩍 넘는다. 그의 몸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재판하면 공소장이 3천 장이 넘어요. 공소장 읽고 싸워야 했죠. 결국 참담하게 이렇게 됐어요. 몸을 돌볼 틈이 없었어요.” 몸은 무너졌지만 결기는 더 오뚝해졌다. 김형근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이뤄진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을 거부했다. 2002년 외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보상이라니? 보상받을 것이 있으면 민주와 통일로 보상이 되어야지. 국민들의 보다 질 높은 삶의 보상이 되어야지. 영광은 영광을 받을 자격만이 아니라 영광의 조건이 이루어져야 받을 수 있는 거란다.” 보안법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200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전주 완산갑)에 출마하기도 했다. ‘소리만 내는 입술보다 실천하는 손발이 되겠다’는 팻말을 내걸었다. “내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어요.” 1999년 40살 나이에 가까스로 교단에 섰다. 이조차도 정권과 수구세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2006년 12월6일치 기사(‘전교조 교사, 중학생 180명 데리고 비전향 장기수들과 ‘빨치산 추모제’’)가 그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남녘통일 애국열사 추모제’에서 학생들과 전야제에 참석한 게 전부였다. 6·15 공동선언을 외우거나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른 것이 ‘과격한 친북·반미 구호 넘쳐’로 둔갑했다. 수사기관은 ‘불법 감청’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옥죄었다. 법원도 의뭉스러웠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파기환송했다. 이뿐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그는 보안법 혐의로 재판에 계류돼 있었다. 그가 결코 출석할 수 없는 재판 기일이 10월28일 오후 2시로 잡혀 있다. 죽는 날까지 보안법 혐의로 재판에 계류 지난 7월22일 김형근은 그믐처럼 말했다. 5월 초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지만 방 벽에 촘촘한 생활계획표까지 붙이고 독종처럼 살아남겠다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분단이라는 주제에 인권, 노동 다 들어 있어요. 분단 때문에 왜곡돼 있어요. 박근혜로 대표되는, 분단으로 이득 보는 사람들이 가득해요. 이들 세력과 통일을 이루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인 거예요. 시대의 짐을 자기 것으로 안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처세로, 임시변통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생전 김형근은 자신의 이름 앞에 효량(曉凉) 두 글자를 즐겨 썼다. 새벽 그리고 서늘함. 그런 계절에 그는 갔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