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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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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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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테러리즘이란 유령이 지구를 떠돌고 있습니다.

유령은 피흘린 자의 절규로 출현해 돌연변이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엽기토끼가 됐다가 거침없이 피를 뿌리는 지존 람보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퇴적된 본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령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나눕니다. 테러는 악에서 절대악이 되고, 반테러는 절대선의 지위를 구축했습니다. 중세 이후 몇백년 만에 절대선의 반열에 오른 반테러리즘은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반테러리즘이라는 유령의 그림자는 선과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절대악과 내통합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11월 말 아프가니스탄 칼라이 장히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전쟁포로 몰살사건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습니다. 500여명의 포로들은 성전에 참여한 외국계 의용병들로, 테러 관련 혐의를 조사하던 미국 CIA요원과 충돌해 폭동을 일으켰다가 미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몰살됐습니다. 무기를 탈취했다고 하지만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포로들을 (일부는 손을 묶은 채) 살해한 것은, 이들이 장차 테러에 가담할 것으로 우려한 미국이 화근을 없애려고 한 짓이라는 의혹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미국 국방장관은 “외국계 병사가 아프간을 탈출하는 것보다 살해되는 것이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 문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런 야만적 행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국제사면위원회 등이 문제삼은 이 사건도 한 단면일 뿐, 아프간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 수백만명에 이르는 난민이 절대선 앞에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유령은 무자비함에다가 선제공격의 속성을 추가하려 하고 있습니다. 월포위츠 음모단이란 별명이 붙은 미국 강경파는 이참에 이라크를 비롯한 몇몇 불량국가를 손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북한도 언급됩니다. 이들은 과거의 행적과 잠재적인 위협 모두가 반테러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냉전 이후 ‘불량국가에 대한 대처법’으로 작성된 미국 전략사령부의 보고서는 변신을 거듭하는 유령의 유전자코드를 읽게 해줍니다. “우리가 너무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나라로 비쳐지는 것은 자해행위”라며 “불량국가로부터 치명적 이익이 공격당할 경우 미국이 비이성적이고 반드시 보복을 하는 국가로 비쳐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련도 사라지고 거칠 것 없는 상황에서, 힘을 아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이러한 군사주의적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반테러리즘을 전가의 보도로 군사주의적, 패권주의적 속성을 끝없이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익보다 부시의 이익이 동력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불량(rogue)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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